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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Dec 04. 2022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

 

2022년 12월 6일 화요일, 글쓰기 반 마지막 수업이 열린다. 이글은 거기에 낼 숙제다. 이번 글감은 '한 해를 보내며'다. 4년째 같은 주제로 쓰지만, 느끼는 감정은 매년 다르다. 공통점도 있다. 쓸 때마다 머리가 찌근거린다는 것이다. 2019년부터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이 매주 글감을 주면 한 편씩 써내야 한다. 어떨 때는 이삼일을 고민한다. 자려고 누어서도 머릿속에서 글이 맴돈다. 글을 마치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다 좌절하며 포기하기도 한다. 가끔은 '이 노력으로 학위를 받았으면 어땠을까?'라고 가정해 본 적도 있다. 대학원에 다니려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번을 포기했다. 글 쓰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만 투자했다면 충분히 석사는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만큼 글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수업을 듣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서는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배우면서 100편 가까운 글을 썼다. 방학이 되면, 내 글쓰기도 멈춘다. 이번 방학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 수강 신청 기간이 다가오면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그러다 결국 수업료를 낸다. 등록 마감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우리 반 모범생 ㅂ 선생님에게 카톡이 왔다. ㅂ 선생님은 매주 빠지지 않고 좋은 글을 써낸다. 선생님은 내게 왜 수강 신청을 안 하냐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신청해야죠. 숙제가 없으면 글을 안 쓰게 되더라고요. 강제로라도 써야지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ㅂ 선생님도 그래서 신청한다고 했다. 글쓰기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고통스럽고 힘겨운 싸움이다. 그래도 계속 쓴다. 고뇌 끝에 글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희열, 누군가 내 글에 공감해 줄 때 얻는 행복, 작품이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얻는 만족감에 중독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글을 다 쓰면, 가족 카톡방에 올린다. 아내의 입꼬리가 올라가면, 합격 판정이다. 때로는 고칠 부분을 세세히 지적해 준다. 잘 썼다고 격려도 해 준다. 아이들은 다르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은 손뼉 치는 이모티콘만 보낸다. 중3 아들은 가장 객관적이다. 마음에 안 들면 바른대로 말한다. 아들의 어린 시절을 쓴 글도 여러 편 있는데, 그 글은 보여 주지 않았다. 좀 더 크면 내놓으려고 한다. 그때 아들 감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아이들에게 글을 보여 주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이들도 글을 썼으면 하는 게 가장 크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시작해야 더 많은 추억과 감정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고통스럽고 힘겨운 싸움을 스스로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조지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라고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고, 똑똑해 보이고 싶으며,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욕구인 '순전한 이기심'에 가깝다. 지난 10월, 모임 친구 종민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는 오랜만에 보는 중학교 친구 두철이도 와 있었다. 두철이는 나를 엄청나게 반겼다. 원래 글을 그렇게 잘 썼냐고 물었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에 올린 내 글을 읽고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소와 함께했던 시골 추억을 쓴 글이었다. 옆에 있던 태경이는 '어머니의 육개장'이란 글도 꼭 읽어 보라며 거들었다. 나는 그렇게 좋았는데 '좋아요'도 안 눌렀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음 날 아침, 페이스북에는 두철이의 '엄지손가락('좋아요'를 누르면 표시되는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또 하나의 글은 '플스는 내 친구'라는 글이다. 오십이 낼모레인데 게임이나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게임 사용자들이 모인 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생각보다 호응이 좋았다. 30대로 보이는 한 사람이 이 글을 친구에게 공유했는데, 그 친구는 '영화처럼 이어지고 소설 읽는 것처럼 재밌다'는 댓글을 달았다. 나랑 동년배는 완전히 공감하다고 했다. 누군가 내 감정에 호응하고, 내 글을 인정해 준다면 자존감도 올라간다. 글을 쓰지 않았으면 얻지 못할 행복이다. 


약 한 달 전쯤에는 회사에서 국장님이 주재하는 용역 최종보고회가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중요한 회의가 아니면 상사의 인사말을 만들지 않는다.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준다고 해도 그대로 읽지도 않는다. 그날은 참석자들에게 중요하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어서 국장님에게 자료를 드려야 할 것 같았다. 보통 담당 주무관이 작성하는데, 회의 준비로 바쁜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써서 드렸다. 보고회가 시작됐다. 나는 진행을 맡았다. 국장님이 인사 말씀을 할 차례였다. 국장님은 황 사무관이 쓴 글이 너무 좋아서 이 글을 읽는 걸로 인사 말씀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쓴 글을 쭉 읽어 내려갔다. 인사 말씀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나는 인사 말씀이 감동적이어서 박수가 절로 나온다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참석자 모두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글을 잘 쓰면 직장에서도 인정받을 기회가 많아진다.           


며칠 전에는 목포로 가는 버스에서 그동안 쓴 글을 읽었다. 어떤 글은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듣는 것처럼 오글거렸다. 다른 글은 너무 잘 썼다며 자아도취에 빠졌다. 최근에 쓴 글이 더 읽을 만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쓴 글이 좀 더 모이면, 시간을 두고 교정도 다시 해 볼 생각이다. 조지오웰은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라고 했다. 그는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라고도 했다. 내가 쓴 100편의 글은 나만의 삶이 닮긴 투명한 유리창이다. 내가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나중에 자녀들에게 기억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누군가 지금 석사 학위와 내 글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쓰는 것만큼이나 고민될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나이 들수록 내 글이 더 소중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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