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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05. 2023

(캐나다-2) 밴쿠버의 나무

밴쿠버의 나무


하루 전날 짐을 쌌다. 날씨를 검색해 보니 캐나다 기온은 우리나라보다 10℃쯤 낮았다. 도착하는 날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활동복과 정장, 구두, 우산, 110V 콘센트와 같은 잡동사니까지 꼼꼼히 챙겼다. 새로 산 큰 가방을 꾹꾹 눌러 겨우 잠갔다. 비행기에서 읽을 전자책도 여러 권 내려받았다. 잠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새벽 4시쯤 일어났는데 개운했다.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걱정보다는, 캐나다에 간다는 설렘이 더 컸던 것 같다.
 
대표단을 인천 공항에서 4월 23일(일요일) 네 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두 시쯤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재헌이에게 전화가 왔다. 대학 동창이자 입사 동기이며, 지금은 같은 국에서 일하는 친구다.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고맙기는 했지만, 신세를 지는 게 미안해서 여러 번 거절했다. 재헌이는 시간을 정하며, 그때까지 나오라고 했다. 친구의 호의를 계속 물리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재헌이가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며 내 여행 가방을 차에 실었다.

공항에 가면서 20여 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배 탔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인천에서 미국과 캐나다로 가는 배를 탔다. 북태평양을 열 번 넘게 오갔다. 선원에게 힘들기로 악명 높은 항로다. 겨울철이면 저기압의 영향으로 파도가 몰아친다. 배는 놀이동산의 바이킹이 된다. 앞뒤뿐만 아니라 옆으로도 흔들린다. 배가 안 뒤집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시차를 이겨내는 것도 힘들다. 경도 15°마다 한 시간씩 조정하는데, 우리나라와 캐나다는 열일곱 시간 차이가 난다. 캐나다까지는 17일쯤 걸리는데, 도착할 때쯤이면 정신이 멍해진다. 그때 캐나다의 맑은 공기를 마시면 머리는 상쾌해졌다. 눈 쌓인 높은 산과 깨끗한 바다를 보면 마음은 맑아졌다. 캐나다에서 20년 전 찍은 사진을 보여 줬다. 친구는 ‘가스 타운’이라고 하면 그쪽 사람은 모른다고 했다. 혀를 굴려서 ‘개스 타운’이라고 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는 짐을 내려 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사진을 많이 찍어서 보내 달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가장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해외 여행객이 많이 늘었다는데, 공항 2터미널은 한산했다. 약속 시각이 되자 일행이 하나둘 모였다. 다들 들뜬 표정이다. 수속은 빠르게 진행됐다. 비행기를 타려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여섯 시 40분에 이륙했다.

밴쿠버까지는 열 시간쯤 걸린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게 힘들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배를 타고 간 것에 비하면 호강이다. 비행기에는 승객이 가득 탔다. 나는 통로 좌석에 앉았다. 허리가 아프면 일어서서 움직이기도 편하고, 갑갑한 것도 덜하기 때문이다. 먼저 전자책을 꺼냈다. 이문열의 <<삼국지>>를 열 권 담아왔지만, 두세 쪽 보고 가방에 넣었다. 좌석에 달린 모니터로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행기 조명도 어두웠다. 비행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기내식이 나왔다. 우리 열에는 여자 외국인, 남자 유학생, 나 이렇게 앉았는데 전부 비빔밥을 시켰다. 포도주도 한 잔 달라고 했다. 술기운에 자려고 했다. 선잠이 들긴 했지만 금방 깼다. 유학생은 이것저것 주문했다. 나는 그때마다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다소곳이 “저도요”라고 했다. 덕분에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안대까지 얻었다. 컵라면은 속을 생각해서 포기했다. 한국 드라마 네 편을 보고, 두 번째 기내식까지 먹고 나니 도착 안내 방송이 나왔다. 캐나다는 4월 23일 열두 시 40분이었다. 배에서 느끼던 시차와는 사뭇 달랐다. 불편하게 선잠을 잔 데다 하루 만에 열일곱 시간의 시차가 생기니 몸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는 도시 철도를 타고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시내로 갔다. 밴쿠버는 흐려서 맑은 하늘을 볼 수는 없었지만, 공기는 여전히 상쾌했다. 도시 가로수인 왕겹벚나무의 분홍색 꽃이 활짝 피었다. 피곤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하 주무관과 한방을 썼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시내를 돌아보자고 했다. 우리에게 밴쿠버에서 주어진 시간은 반나절밖에 없었다. 숙소에서 가스 타운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렸다. 예전에 배를 탔던 하 주무관도 가 보고 싶다고 했다. 보슬비가 조금씩 내렸다. 밴쿠버는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답게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거리에 차와 사람도 많았다. 조금만 걸어도 왜 다민족 국가인지 알 수 있다. 내게 길을 묻는 외국인도 있었다. 항구에 배들이 보였다. 오래전 배에서 내려 이곳으로 걸어왔을 나를 상상했다.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행복했을 것이다. 가스 타운의 상징인 증기 시계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섰다. 그곳도 빨리 찾고 싶었다. 하 주무관에게 비슷한 데가 있는지 봐 달라고 했다. 그렇게 5분쯤 걸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나무가 있었다. 예전보다 굵어졌지만, 휘어진 각도는 비슷했다. 주위의 건물, 거리를 보니 확실했다. 나무를 두어 번 어루만졌다. 그때처럼 또 추억을 남겼다. 비는 조금씩 굵어졌다. 더 걸을 수 없었다.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있는 차이나타운 주변에는 부랑자와 마약 중독자가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20년 전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 거리를 걷던 젊은 청년, 그는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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