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깊은 바다 May 13. 2023

(캐나다 4) 두 번째 봄

역시나 새벽 12시가 조금 넘어서 눈이 떠졌다. 하 주무관과 방을 같이 써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또 양 한 마리, 두 마리를 셌다. 비몽사몽으로 있다가 다섯 시쯤 됐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 왔다. 나는 까치발로 밖에 나갔다. 항구는 여명과 도시의 조명이 어우러져 조금씩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해안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낮과는 또 다른 고요함이 매력적이다. 새들은 힘차게 지저귀며 아침을 깨웠다. 푸른 숲과 바다의 향기가 어우러져 공기는 상쾌했다. 도시 곳곳이 잘 정비된 공원 같다. 그래서인지 이른 시간인데도 달리는 사람이 많다. 여기 살았으면 마라톤 선수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힘차게 달렸다. 역시나 5분을 넘지 못하고 헉헉댔다. 여기서는 관광객과 주민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한다. 인사를 들을 때마다 행복했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풍요로운 자연과 환경이 사람의 마음마저 비슷하게 바꾸는 것 같다.


한 시간쯤 해안 길을 걸었더니, 비콘힐 파크가 나왔다. <세계테마기행>에서 가수 장기하가 소개했던 공원이다. 장기하는 자신의 노래 <느리게 걷자.>와 빅토리아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했다. 공원을 걸으면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라는 내용의 가사다. 캐나다에서는 길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공원에는 오리와 청설모, 토끼가 자유롭게 뛰논다. 산책하는 개들도 야생 동물을 공격하거나 짖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자동차의 경적도 들을 수 없었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게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그런 것 같았다.


셋째 날부터는 본격적인 회의가 열렸다. 여덟 시 30분에 각 그룹의 의장단이 모였다. 캐나다 측 진행자가 회의 일정과 방법을 알려 줬다. 그러고는 의장단에게 인사를 시켰다. 다행히 그룹 멤버에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스크립트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필요한 말들만 추려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면 식은땀이 날 뻔했다. 일본 의장인 30대 중반의 야마모토가 질문을 했다. 총회 발표는 어떤 언어로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물론 듣고 싶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캐나다 진행자는 동시 통역자가 있으니, 원하는 언어로 하라고 했다. 나는 일본 의장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는 일본어로 하겠다고 했다. 큰 시름을 덜었다.  


우리 그룹은 이틀간 세 건의 과제 진행 사항을 발표하고, 다섯 건의 사고 정보를 공유했다.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어서 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미국 해안경비대 메건과 워크맨이 잘 웃어 주었다. 그들은 영어 실력이 부족한 구성원을 많이 배려했다. 나도 준비한 필리핀 해양 오염 지원 사례를 영어로 발표했다. 발음이 좋진 않았지만 다들 열심히 들었다. 잘했다고 격려도 해줬다. 수요일부터는 총회 발표 준비에 들어갔다. 하 주무관은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구성원과 영어 문장을 손 봤다. 나는 총회 발표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한글이었지만,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그날 저녁, 어이없는 소식을 들렸다. 일본 의장이 영어로 발표하겠다고 주최 측에 통보했다. 이제 혼자만 영어로 발표가 아니었다. 나는 왜 훌륭한 모국어를 놔두고 국제회의에서 영어로 발표하느냐고, 하 주무관에게 하소연했다. 하 주무관은 한글로 해도 상관없으니까 준비한 대로 잘해 보자고 했다.


마지막 총회 날, 또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서 눈이 떠졌다. 스크립트를 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한 시간쯤 하고 나니 눈이 감겼다. 그날은 일곱 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깊게 잤더니 개운했다. 총회 발표장에는 스크린이 설치됐다. 동시 통역사와 장비 기술자가 바쁘게 오갔다. 한국 통역사부터 찾았다. 그리고 잘해 달라고 부탁했다. 통역사는 말만 빠르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일본 의장이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각국 단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여섯 개 그룹 의장 발표가 시작됐다. 일본 의장은 일본인이 영어를 못한다는 내 선입견을 깰 정도로 발음과 억양이 좋았다.


이제 내 순서가 됐다. 생각보다 많이 떨리지가 않았다. 나는 영어로 인사했다. 그리고 " I'd give you a chance to wear a headset.(당신에게 헤드셋을 쓸 기회를 주겠다.)"이라고 했다. 그들은 웃으며 통역 헤드셋을 썼다. 발표는 속도를 늦춰 느리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했다. 한글하니까 여유가 있었다. 참석자의 눈도 많이 맞추고, 표정도 읽을 수 있었다. 스크립트만 보고 읽기 바빴던 다른 의장보다는 낫다고 위로했다. 나는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한국의 벚꽃은 4월 초에 졌습니다. 빅토리아의 벚꽃은 제가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활짝 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 빅토리아에서 두 번째 봄을 만끽했습니다. 저는 이번 회의에서 캐나다의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환경을 보며, 위기 대응 그룹의 역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제23차 NPCGF 회의를 알차게 열어 주신 캐나다 해안경비대 여러분에게 위기 대응 그룹을 대표하여 고맙다는 말씀드립니다. 그룹 과제와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회원국 멤버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올해 두 번째 봄은 여러분이 함께해 주셔서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인사말을 마칠 무렵, 청중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회의장에 박수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 주무관과 우리 대표단도 아주 좋았다며 격려했다. 우리 그룹 구성원도 너무 멋진 발표였다고 엄지를 세웠다. 벚꽃은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봄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걸 이번 회의에서 알게 됐다.


총회를 마치고 오후에는 환송 만찬을 했다. 각국의 회원들은 따로 모여 술을 마셨다. 야마모토도 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농담을 섞어 왜 배신했느냐고 물었다. 영어 발표가 너무 좋았다고 칭찬도 해 줬다. 그는 단장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그는 미국 미시간 대학을 2년 다닌 유학파였다. 나는 9월 기관장 회의 때는 서로 모국어로 하자고 손가락 걸며 약속했다. 그도 꼭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고 한국어로 할 계획이다. 그게 가장 자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요일에 캐나다에서 출발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전혀 지루하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다. 고추장을 듬뿍 넣어서 기내식 비빔밥도 먹고, 맥주도 익숙하게 시켰다. 한국에 도착하니 토요일 오후였다.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얼큰한 국물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잤다. 일요일 아침, 개운하게 일어났다. 올해 두 번째 봄은 내 마음속에 피었다.        


작가의 이전글 (캐나다-2) 밴쿠버의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