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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13. 2023

(캐나다-3) 빅토리아

기억은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흐릿했다. 분명한 건 그때도 지금처럼 설레고 행복했다는 것이다. 20년 전에 배가 캐나다에 도착하면, 반나절쯤 땅을 밟을 기회가 주어졌다. 보름 넘게 파도에 시달리고, 외로움에 지친 선원에게 주는 보상이다. 다시 항해하는 데 필요한 기운을 얻는 일이기도 했다. 감회에 빠져 있을 무렵 빗줄기가 굵어졌다. 큰 숙제를 마쳐서인지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길을 걷다가 어느 술집 앞에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춰 섰다. 가게 앞에는 반라의 여성 댄서 포스터가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 주무관이 장난기 섞인 얼굴로 “혹시 이런 데 와 봤어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보며 웃고 말았다.


숙소에 들어오니 피곤이 몰려왔다. 비행기에서 한두 시간 쪽잠을 잔 게 전부였다. 잠시 눈을 붙였더니 한결 나았다. 저녁은 함께 먹기로 했다. 캐나다에서 공부했던 직원이 레스토랑을 골랐다. 나는 가격이 좀 나가는 스테이크와 맥주를 주문했다. 배에서 먹던 고기 맛이 그립기도 했고, 이런 기회가 쉽게 오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계산은 각자 하기로 했다. 열 명이 주문한 음료까지 개인별로 기록해 두었다가 영수증을 따로 주는 게 신기했다. 캐나다 물가를 보면, 더치페이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는 스타벅스 커피값(4,500원)이 우리나라 컴포즈 커피값(1,500원)처럼 느껴진다. 다른 음식료가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팁까지 줘야 한다. 선택이 아니라 반 의무다. 서비스의 만족도에 따라 음식값의 10%에서 25%까지 고를 수 있다. 10%는,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에겐 낯선 문화였다. 팁 때문에 경제적 부담을 느끼는 캐나다인도 점차 많아진다고 한다.


배도 부르고 맥주까지 한잔해서인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이 떠졌다. 눈꺼풀은 무거웠고, 몸은 찌뿌듯했다. 밖은 어두웠다. 불길한 예상이 맞았다, 새벽 열두 시다. 유튜브로 숙면에 드는 영상을 보고, 양의 수를 세다가 네 시쯤 겨우 눈을 붙였다. 올 때까지 계속 그랬다. 캐나다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건 시차 때문에 생기는 수면 부족이었다.


4월 24일(월요일), 일곱 시 30분에 로비에서 일행을 만났다. 대부분 잘 잤냐고 묻는 게 아침 인사였다. 회의가 열리는 빅토리아섬까지는 비행기로 30분쯤 걸린다. 밴쿠버 공항은 한산했다. 비행장에 우리가 탈 쌍발기가 보였다. 창가에 앉으면 경치가 잘 보일 것 같았다. 높은 데서 캐나다의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게 기대됐다. 같은 비행기를 타려는 동남아계 여성이 보였다. 서너 살쯤되는 딸을 등에 메고, 짐 가방 두 개를 들었다. 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아들도 가방 하나를 맡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도와주세요!’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내밀자, 그녀는 미소로 답했다. 나는 엄마를, 하 주무관은 아들을 도왔다. 우리는 거의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승무원도 우리의 호의를 눈치챘는지 엄지를 세웠다. 비행기는 절반쯤 비었다. 밖이 잘 보이는 자리로 옮겨 앉았다. 비행기는 파란 하늘과 바다, 넓게 퍼져 있는 푸른 섬이 잘 보이게 날았다. 군데군데 떠 있는 요트가 여유로워 보였다. 창에는 웃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우리는 공항 출구까지 함께했다. 그녀의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녀의 아들도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빅토리아의 하늘은 높고 파랬다. 강렬한 태양이 눈 부셨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캐나다 해안경비대 직원이 앞에 있었다. 우리는 안내에 따라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차로 30분쯤 달렸다. 이비에스(EBS) <세계 테마 기행 – 느리게 걷자, 빅토리아> 편에 나온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의사당이 보였다.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딴 도시 명칭만큼이나 영국 색채의 건물이 많다. 주 의사당은 빅토리아의 랜드마크다.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웅장한 건물과 푸른색 지붕은 노랑, 파랑, 하얀 튤립, 분홍 벚꽃,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탄성을 자아냈다.


회의 장소는 주 의사당 옆에 있는 호텔이다. 우리는 거기서 머물렀다. 오늘 일정은 저녁 리셉션이다. 짐을 풀고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몇 걸음 걷다 멈추길 반복했다. 아무 데서나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됐다. 여유롭게 걷는 사람, 새끼를 데리고 인도를 평화롭게 노니는 거위,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 이국적인 건물 모든 게 영화 같았다. 시간을 멈출 수 없는 걸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다.


점심은 현지에서 유명한 노점인 ‘레드 피시 블루 피시’에서 먹었다. 생선과 감자를 튀겨낸 ‘피시 앤 칩스’가 대표 메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손님이 붐볐다. 운 좋게 바다가 보이는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생선은 신선했고, 부드러웠다. 튀김은 바삭했다. 여러 인종의 사람과 섞여 빅토리아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먹던 한 끼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저녁 여섯 시에 리셉션이 열렸다. 행사는 캐나다 대표의 환영사로 시작됐다. 원주민 대표로 보이는 60대 여성의 축사가 인상적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서양의 침략으로 희생당한 원주민을 추모하며, 이 행사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 같았다. 이 여성은 폐막 리셉션 때도 나왔다. 공공 기관의 행사마다 의무적으로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이 이미 사회적 합의가 끝난 ‘제주 4.3 사건’을 깎아내려 시끄러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리셉션의 음식은 조촐했다. 하 주무관은 미국과 캐나다 만찬장에 오면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대표단이 언짢아한다고 했다. 우리는 손님에게 성대한 음식을 내놓지만, 북미권 두 나라는 다르다는 것이다. 게다가 술은 사서 마셔야 했다. 그렇다고 성의가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의 문화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은 음식의 가짓수와 맛이 아니라 손님을 대하는 마음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음식을 먹으며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명단을 사전에 알려 줘서인지 우리 그룹 구성원들이 내게 먼저 다가왔다. 중국과 러시아는 안타깝게 참석하지 못했다. 우리 그룹은 하 주무관과 나, 인상이 좋은 일본 40대 남성 다카시, 웃는 게 매력적인 미국 30대 여성 메건, 생기가 넘쳐 보이는 미국 20대 여성 와트맨, 쾌활한 성격의 캐나다 40대 남성 폴이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내일 회의도 잘될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국제 경험이 풍부한 하 주무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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