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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Jun 03. 2023

아빠의 오열

아빠의 오열


"너희 아빠 또 오열하겠다.” 요즘 영어 학원 선생님과 친구들이 딸을 놀리며 하는 말이란다. 딸은 창피하지도 않은지 피식 웃으며 집사람과 내게 조잘댔다. 올해 초, 아내는 나를 영어 학원 카톡방에 반강제로 가뒀다. 딸을 심하게 나무라는 아내에게 한마디 했더니, 아내는 얼마나 답답한지 느껴 보라고 했다.


카톡방에는 학원생과 학부모 스물일곱 명이 있다. 학원에서는 단어 시험 결과를 카톡방에 올려 준다. 나는 딸이 점수를 잘 받으면 ‘엄지손가락을 세운 이모티콘’, 재시험을 보게 되면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누른다. 아빠도 보고 있으니, 더 노력하라는 의도다. 학원에는 재시험 단골 두 명이 있다. 며칠 전에 딸은 그 남자아이와 다투면서 우리 엄마가 너는 안다고 했단다. 그러자 그 아이는 우리 엄마도 너는 안다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카톡방에서 많이도 울었다.


올해 중학생이 된 딸은 사춘기가 시작됐는지, 엄마와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공부는 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많이 보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시간도 부쩍 늘었다, 나는 딸에게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수학과 영어 학원에 빠지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다. 두 과목을 일찌감치 포기했던 나를 닮은 것 같아 미안해서다. ‘수포대포 영포인포(수학을 포기하면 대입을 포기하는 것이고, 영어를 포기하면 인생을 포기하는 것)’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수학과 영어, 그중에서도 영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신조어다. 나는 여기에 완벽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인생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면 더 즐겁게 살 수 있다. 딸에게 영어만큼은 잘 배워 두라고 하는 이유다.    

 

얼마 전, 캐나다 출장을 다녀와서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젊어서 외국을 다니는 배를 탔고, 필리핀 선원들과 일해 간단한 회화는 하지만,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만찬장에서나 술자리에서 외국인과 몇 마디 나누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졌다. 번역 앱이 좋아지긴 했지만, 친밀감을 쌓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룹 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유롭게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직원이 부러웠다. 당장 영어를 쓸 일이 없다고는 하지만, 기회는 이번 출장처럼 언제 올지 모른다.


나는 유튜브 ‘키위엔 영어 회화’로 공부한다. 준 선생님은 미국의 버클리 대학에 다니던 중 한국에 들어왔다가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 현실에 충격을 받아서 치과 의사라는 꿈을 버리고 영어 선생님이 되었다. 한 달 남짓 공부했는데,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됐다. 그는 나처럼 문법 기초가 부족한 사람도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언젠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동기 부여한다.


아들을 보면서 중2병은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낫는다는 걸 알게 됐다. 공부도 스스로 해야 능률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성적이 오른다는 것도 그렇다. 딸도 그러리라 믿는다. 딸이 나처럼 지방대에 가도 좋다. 대학에 가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도 마찬가지다. 딸은 영어 초급반 카톡방에 가장 오래 혀 있다.


오늘도 나는 오열했다. 슬퍼서가 아니라 딸을 응원하는 눈물이다. 딸은 마라탕이 먹고싶다며 엄마를 졸라 7천원을 받아서 집을 탈출했다. 외국 여행에 데려 가서 영어를 시켜 봐야겠다. 카톡방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필요하고 재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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