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빼다
<<50살이 되기 전에 한 50가지 일>>
상자에 담겨 있던 여름 당직 옷을 꺼냈다. 5월 25일인데, 벌써 더워졌다. 당직을 서려고 바지를 입었는데, 헐렁하다. 바지 틈으로 주먹이 들어간다. 바지는 작년에 허리둘레를 재서 맞춘 거다. 그리고 여러 번, 잘 입었다. 가끔 밥을 먹고 나면 바지 후크를 풀긴 했지만. 혁대를 꽉 잡아당겼다. 허리에는 여러 개의 바지 주름이 생겼다. 옷맵시가 볼품없다. 고등학생이 아버지의 정장을 입은 꼴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웃음이 난다. 이게 다 4개월 간 땀 흘려서 얻어 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기필코 살을 빼려고 마음먹었다. 목표도 구체적으로 세웠다. 앞자리 수를 7에서 6으로 바꾸는 거다. 서른 살 쯤부터 내 몸무게는 70kg 이상이었다. 체질량 지수는 과체중과 비만 사이를 오갔다. 작년 12월, 아내는 내 볼록 튀어나온 배를 보더니 저울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속도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저울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짐작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더 기가 막힌다. 겸연쩍게 아내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아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나를 째려본다. 나는 몇 마디 듣다가 고개를 숙이고 큰방으로 피했다. 78kg, 내 인생 최고의 몸무게다.
뒤룩뒤룩 찐 살 때문에 외모가 볼품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건강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고질병이던, 디스크(척추 원반 탈출증)는 더 심해졌다. 오른팔이 먼저 저렸다. 목까지 그래서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했다. 고지혈도 수치가 높아졌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었다. 다행히 1월 15일, 4년 간의 기러기아빠 생활도 잠시 막을 내렸다.
먼저, 운동부터 시작했다. 내 스마트폰은 다섯 시 30분에 울린다. 얼굴에 물만 묻히고, 헬스장에 간다. 러닝머신에서 달리기를 45분, 근력 운동을 20분쯤 한다. 점심시간에도 수변 공원을 40분쯤 걷는다. 식단은 특별하게 관리하지 않았다. 아침은 두유와 삶은 달걀 두 개를 먹는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남들 비슷하게 뜬다. 밥만 의식하면서 한 주걱 덜 던다. 저녁도 차려 준 대로 먹는다. 아내는 가끔 다이어트하는 사람 맞냐고 묻는다. 단지, 작년에 비해 바깥 음식 먹거나, 술자리에 끼는 횟수가 줄긴 했다. 3월 말, 내 몸무게는 74kg이었다. 살은 더디게 빠졌다.
다음은 술을 줄였다. 4월 5일, 치과를 찾았다. 그간 미뤄뒀던 임플란트를 하기로 했다. 살 빼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질긴 고기도 못 먹고, 먹는 양도 줄었다. 술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아내만 맥주 마시는 게 얄미웠다. 이제는 그걸 보면서 대리 만족할 경지에 이르렀다. 임플란트 수술이 끝나고 나서 간호사에게 한 첫 질문도 언제부터 운동할 수 있느냐였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술부터 물었겠지만.
5월 14일 아침, 샤워를 하고 나서 머리카락의 물 한 방울까지 깨끗이 말렸다. 0.1g이라도 줄이려면 그래야 한다. 기대를 품고 저울에 올랐다. 저울 숫자판은 이번에도 빠르게 올라갔다.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69.9kg. 사진부터 찍었다. 그 뒤로 이삼일은 십의 자리 숫자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다 68.3kg를 한 번 찍더니, 60kg 대에서 완전히 자리잡았다. 넉 달 만에 10kg 가까이 뺐다.
요즘 세수하면서 알게 된 게 있다. 얼굴을 물로 씻다 보면 광대뼈가 만져진다는 거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닿는 촉감이 낯설었다. 얼굴 윤곽을 두루 만지면서, 거울을 보며 살포시 웃었다. 평생 이 느낌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살 뻔했다. 살이 빠지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디스크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이제 팔 저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목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하니 활력이 넘친다. 몸은 쓸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흔히,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엔도르핀도 저녁보다는 아침에 운동할 때 더 많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러면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지는데, 뇌로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돼 집중력과 일의 능률도 높아진다고 한다.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목표 하나를 이뤘다는 성취감을 얻는 건 덤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과 관련해 여러 착각을 하며 살았다. 대학 다닐 때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줄 알았다. 야식을 자주 먹고, 술도 많이 마셨지만 63kg를 유지해서다. 매일 아침 4km 이상을 뛰고, 저녁에도 운동을 빼먹지 않았던 걸 간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인생의 희로애락에 따라 살이 찌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먹는 양은 늘었는데, 운동량은 줄었으니 당연한 거다. 그러면서 한번 찐 살은 쉽게 빠지지 않는 거라고 관념화했다. 그러면서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노력하면 4개월 만에도 할 수 있었던 일을 최선을 다해 보지도 않고 포기했던 것이다.
<<강원국 글씨기>>에서 저자는 글쓰기 어려운 이유를 뇌가 예측이 어렵고 모호한 것을 피하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글을 계속 쓰면 글은 적이라고 여기던 뇌가 거부하는 것도 힘들어하며 한번 도와주고 끝내자고 마음먹는다고 한다. 60일이 넘으면 습관이 되고, 무의식에 습관이 장착된다고 한다. 살 빼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뇌도 힘드니까 피곤한데 쉬자는 신호를 계속 보냈다. 시간이 지나고, 살이 빠지면서 거울을 보는 횟수도 잦아졌다. 나도 모르게 미소지어진다. 당연히, 뇌도 그마음을 알 것이다. 그래서 아침이면 뇌에서 자극을 보내는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운동 안 할 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