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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19. 2024

밥값을 하다  

처가에 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설치해 봐. 이번에는 한 번 믿어 볼게." 아내가 '이번에'를 붙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물건을 만지면 고장 나거나, 엉성하게 해 놔서 나 대신 아내가 뒤처리했다. 그것도 여러 번. 그때마다 아내는 물었다. "기계 고치던 손 맞아?" 이번에도 아내는 속는 셈 치고 내게 일을 맡겨 보겠다고 했다. 하다 안되면 처가에 놀러 온 매부에게 부탁하면 될 테니까. 나도 때론 사소한 일에 자존심 상한다.


현관 앞에는 아내가 주문한 택배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먼저, 포장지를 조심스레 뜯었다. 비데 설치 설명서를 암호 해독하듯 찬찬히 읽었다. 어렵게 써 놓아서인지, 아니면 내 문해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만만치 않아 보였다. 17년 전, 그러니까 신혼 초기부터 우리와 함께하다 수명을 다한 물건부터 떼어냈다. 새로 온 걸 변기에 올려놓고 스패너로 볼트를 잠갔다. 드라이버로 나사도 조였다. 본체를 고정하면서 살짝 고비도 있었다. 그때 아내의 화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도 덧붙이겠지. 여기서 포기하면 내 생애 일부를 또 부정당할 판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비데를 몇 번 좌우로 흔들었더니,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 전기까지 연결하고, 동작 단추를 눌렀다. 노즐에서 물이 강하게 솟구쳤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볼일을 본 듯, 속이 뻥 뚫린다. 아주 작은 일에 희열까지 느껴졌다. 숨도 쉬지 않는 기계지만, 내 손길로 생명을 불어넣은 느낌이랄까! 아내에게는 풀이 죽은 시늉을 하며 전화했다. "와! 이거 도저히 안 되겠는데."    

     

오늘 같은 쾌감을 처음 맛본 건 25년 전이었다. 1999년 대학을 졸업하고, 중견 상선 회사에 취직했다. 1997년 불어닥친 아이엠에프(IMF, 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의 여파는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대기업의 취업문은 장학생이나 돼야 노려볼 만큼 좁아졌다. 친구들은 염두에도 안 뒀던 회사의 문을 두들겼다. 배를 타야 군 복무가 면제되는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입대한다는 소식도 간간히 들려왔다. 그에 비하면 나는 복에 겨운 거였다. 그렇다고 마냥 기쁜 것도 아니었다. 배를 타는 게 고되고 외롭다는 걸 대학 3학년 때 실습하면서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걱정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벚꽃은 늘 그렇듯 연분홍 꽃망울을 틔우고 있었다. 봄기운이 대지에 퍼질수록, 조바심이 났다. 휴대 전화를 살피는 횟수도 늘어 갔다. 두 달이 지날 무렵, 부산 지역 번호로 전화가 왔다. 회사 인사 담당자였다. 인천으로 배가 입항할 예정이니, 준비하라고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고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서두르자고 마음먹으니 홀가분했다. 여러 달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챙긴 큰 가방을 끌고,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있는 연안부두를 걸었다. 화물선의 선원들은 싣고 온 밀을 하역하면서,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기름과 선원의 땀 냄새가 밴 방에 짐을 풀었다. 배는 미국, 캐나다, 호주, 콜롬비아 등을 오가며 곡물과 광석을 실어 날랐다. 나는 배의 기계를 손보는 기관부였다. 그렇지만 기계치였다. 내 손은 세밀하지도, 야무지지도 못했다. 대학교 때 10개월간 실습하면서, ‘과연 이 길을 잘 선택한 걸까?’라는 고민을 수없이 했다. 노력했지만, 실력이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계를 만지는 손재주도 타고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달력에 가위표를 쳐가며, 내릴 날만 손꼽고 있었다. 지금 떠올려 보면 배에서는 겨우 밥값만 하는 존재였다. 어쩌면 밥만 잘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배는 한 번 타면, 10개월은 그곳이 직장이자 집이 된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배에서는 특히,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중요했다. 배는 바다를 떠다니는 영토이면서, 20여 명의 선원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작은 사회다. 게다가 길이 200m, 폭 40m에 한정된 공간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벗어날 수도 없다. 한 명이라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하루하루 사는 게 고역이 된다. 그중에서도 조리장을 잘 만나는 건 선원에게는 축복이라고 했다. 그의 손맛과 정성에 따라 삶의 질뿐만 아니라 배 분위기도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항구를 떠나서 하루쯤 지나면, 사방으로 수평선이 펼쳐진다. 만나는 사람도, 하는 일도 매일 비슷하다. 7일쯤 항해하다 보면 누가 탔는지도 모를 배가 보여도 손을 흔든다. 15일이 넘어가면 이름 모를 작은 새가 갑판에 앉아 있는 걸 본 것도 이야깃거리가 된다. 그래도 끼니마다 차려지는 음식은 시간이 흐르고 날짜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변한다. 배에서는 미세하게 다른 것조차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선원에겐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식사가 끼니를 때우는 의미 이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따지자면, 아침은 제외해야겠다. 365일 비슷한 맛을 내는 된장국이 차려진다. 냄비에 물을 가득 넣고, 된장 딱 한 수저만 풀면 날 맛이다. 기관부의 일과는 일곱 시 45분부터 시작한다. 한창 젊을 때라 아침잠이 항상 부족했다. 시계 알람이 울리면 고양이세수만 하고 작업복을 챙겨 입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 억지로 집어넣는다. 기관실까지 내려가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모여서 그날 할 일을 주제로 차를 마시며 회의를 했다. 다디단 커피믹스를 반쯤은 비워야 정신이 좀 든다. 기관실의 온도는 엔진 배기 열 때문에 40도에 육박한다. 프로펠러를 돌리려고 동력을 만들어 내는 폭발음 때문에 귀마개를 끼지 않으면 고막이 먼저 터질 것 같다. 선박 연료유 청정기 정비가 잡혀 있는 날은 각오해야 한다. 이곳은 다른 데보다 온도가 5도쯤 더 높다. 서 있기만 해도 작업복은 땀과 기름으로 범벅이 된다. 서너 시간 일하면 몸이 축 처진다. 밥심이 아니라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조리부가 너무 성의 없다고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거냐?”라고 험담하면서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국자를 뜨고 있었다. 눈은 반쯤 감긴 채 말이다.


점심은 오이냉국, 생선구이, 비빔밥 등이 나왔다. 대개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땀을 비 오듯 흘렸으니, 밥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선원들의 밥 먹는 속도는 비행기처럼 빠르다. 점심은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 같다. 밥그릇을 비우면 약속이나 한 듯 곧장 자기 방으로 향한다. 소파에 누우면 금방 곯아떨어졌다. 30분쯤 자고 나면, 피로는 가셨고, 머리는 맑아졌다. 아침에 마셨던 커피보다 더 달콤했다. 나는 열두 시까지 당직이었지만, 다시 기관실에 내려갔다. 선임인 2기사에게 기술을 배우려면 쉬는 시간을 조금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이 생기지도 않았다. 빨리 밥값을 하려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저녁에는 꼬리찜, 티본스테이크, 엘에이 갈비와 같은 푸짐한 요리가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술도 서너 잔씩 기울이면 하루의 노고를 보상받는 것 같았다. 노곤했던 몸도 조금은 풀렸다. 식사 이후에는 자유 시간이다. 선박 식용품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올려준 텔레비전 녹화 비디오를 보며 육지의 향수를 달랬다. 한 달쯤 항해하다 보면, <가요무대>도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선원은 고독을 삼키면서 사는 직업 같았다. 밖이 어두워지면 다시 방으로 올라가서 혼자가 됐다. 조명 스탠드만 켜고, 전공 서적을 읽었다. 이론을 실제 기술로 적용해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책장을 넘기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다가 외롭거나 허전해지면 선교에 올라갔다. 팔을 벌려 선선한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을 들이켰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 박혀 있던, 외로운 감정을 함께 뱉어냈다. 밤하늘의 별은 유난히 더 반짝였다. 가끔은 불꽃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처럼, 별똥별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 날은 모든 걱정을 바다와 하늘에게 맡기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배에서는 야식도 즐겨 먹었다. 2기사가 되면 열두 시부터 네 시까지 새벽 당직을 선다. 정신이 혼미한 시간이라 기계를 다루다 보면 사고가 날 수 있어서, 서류 작업하거나 기부속을 정리한다. 같은 팀이었던 필리핀 직원은 한 시가 되면 주방에 갔다. 볶음면을 잘 만들었는데, 면에 간장을 뿌리고, 고기를 넣어 볶는 동남아식 요리다. 거기다 밥까지 비벼 먹었다. 배가 고파서다기보다는 시간을 때우려는 게 컸다. 유난히도 천천히 흐르는 배의 새벽 시간만큼이나, 뱃살은 조금씩 그리고 점점 늘어갔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 있다. 마지막 탔던 배는 기관실이 무인화 설비를 갖춰서 평일 여덟 시부터 다섯 시까지 일하고, 토요일 오후부터 빨간날은 쉬었다. 토요일 점심으로 자주 나오던 참치 회덮밥은 꿀맛 같은 휴식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날은 외식을 하러 가는 것처럼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살짝 언 두툼한 참치를, 야채 위에 수북이 올려 줬다. 밥솥에서 막 푼 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초장과 참기름을 넣고 신이 나게 비볐다. 참치가 먹기 좋게 녹는다. 입에 한 수저 넣고 오물거리면, 매콤하면서도 담백하고 새콤하면서도 부드러워서 한 주간 쌓인 고달팠던 기억이 모두 녹아내렸다. 그러고 보면 배 타면서 조리장 복이 참 많았다. 배를 타던 시절을 추억하면, 음식이 떠오르고, 아직까지 군침이 도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내 목표를 채우자 곧장 사표를 냈다. 태평양과 적도를 떠다니며 달력에 천여 개의 가위표를 그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계획이나 목표가 뚜렷하게 있던 것도 아니었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은 밥값을 해야 하는 거라고 자주 말했다. 땀 흘려 기른 쌀을 먹으려면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르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방향을 잃고 헤맸다. 스트레스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걸로 풀었다. 허리둘레는 배 탈 때보다 더 빠르게 늘어 갔다. 1년쯤 헤매다 보니, 내 인생의 풍랑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에서 더 세게 몰아쳤다. 태풍이 불면 배는 흔들렸지만, 복원성이 있어 더 이상 기울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며칠 지나면 다시 바다는 평온해졌고, 배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육지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작은 외풍에도 흔들렸고, 누구도 날 보호해 주지 않았다. 내 인생은 내가 목적지를 정해, 스스로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항해해야 했다. 


암흑 같은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작은 불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지금 다니는 직장의 채용 공고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곳에 정착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다행히도 시험은 대부분 전공과목에서 나왔다. 배에서 부족한 실력을 채우려고 계속 공부했고, 기름밥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리 어렵진 않았다. 시험을 마치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운도 따라 찍은 것까지 몇 문제 더 맞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안전하게 닻을 내렸다.


그 후로 20년 넘게 한 곳에서 밥벌이하고 있다. 그 덕에 가정을 이뤘고,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삶의 순간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긴 선을 그리는 거라면, 배를 탔던 3년은 내 인생에서 짧지만 가장 굵었다. 바다, 선원, 땀, 기계, 별들이라는 작은 점들이 없었더라면 이을 수 없었다. 내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밥값을 하려고, 땀 흘렸기 때문에 이뤄낼 수 있었다. 배에서 먹은 음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밥심으로 일할 수 있었고, 삶의 활력소 삼아 지루한 시간을 알차게 보냈기 때문이다. 만약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했거나,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나는 그 굵게 그린 선 때문에 중심을 잃지 않고, 크게 흔들리지 않으며 인생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내는 집에 오면서 처제와 매부까지 데려왔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는 목소리를 냈지만, 아내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벌써 함께 산 지가 18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하다. 내 능력을 살피고 온 아내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은 밥값 제대로 했네."라며, 다들 보는 데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도 오늘은 당당하게 한마디 했다. "그래, 나도 한때는 기름밥을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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