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삶을 이겨 내는 비결
<50살이 되기 전에 한 50가지 일>
괴로운 삶을 이겨 내는 비결
"하루하루 보내는 게 정말 괴롭습니다." "집에서 다니니까 좋지?"라는 선배의 질문에 내가 한 대답이다. 반어법을 섞어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내 심정을 이만큼 잘 드러낼 문장도 딱히 없을 것 같았다.
1월 15일, 새 근무지로 처음 출근하는 날이었다. 새벽 일찍 깼지만, 푹 자서 개운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할 기대에 설레기도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오랜만에 넥타이까지 맸다.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현관을 나섰다. 회사까지는 차로 5분 거리다. 지난주만 해도 내 근무지는 인천에 있는 본청이었고, 2주에 한 번씩 버스를 다섯 시간 타고 집에 내려왔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출근하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데 4년이 걸렸다.
사무실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색하고 낯선 기분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사라졌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만 변해서 돌아온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을 뿐이다. 나는 전에 짐을 쌌을 때보다 네 살을 더 먹었고, 그 덕에 직급은 한 계급 올랐다. 책상도 창에서 가장 가까워졌다. 의자만 돌리면 영산강과 목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영암 쪽 산등성이를 타고 떠오르는 일출도 장관이다. 요즘은 사무실에서 키우는 무화과나무 잎이 쑥쑥 돋는 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업무도 본청에 비하면 수월하다. 무엇보다 평일에도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이 기다린다.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다. 이런 날이 하루씩 줄고 있으니,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직급이 되면, 2년마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퇴직이 12년 남았으니, 적어도 대여섯 번은 그럴 거다. 그중 절반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발령의 '발' 자만 떠 올려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유다. 그러다 한 작가의 글을 읽고 맘을 바꿔 먹기로 했다. 그는 소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데, 거기서 일어난 일과 만났던 사람들을 주제로 글을 쓴다. 아욱국 음식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때 떠오른 게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였다.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다면, 그 걱정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래서 떠 올린 게 '이산가족 2년'이 아니라 '삶을 가꾸는 여행 2년'이었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날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여행을 만끽하는 것뿐이다.' 시간 여행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그린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 명대사다. 내게는 퇴직 전까지 여행지를 바꿀 수 있는 대여섯 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여행을 하고 있다. 이제 막 6월이 됐으니, 2년이라는 기간으로 나눠 본다면, 이제 막 5분의 1이 지났을 뿐이다.
지난 5개월을 대표할 단어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빼다.'다. 1월 초에 78kg이던 몸무게는 꾸준히 운동했더니, 68kg이 됐다. 디스크 때문에 팔과 목이 저리던 게 한결 나아졌다. 한번 찐 살은 쉽게 빠지지 않을 거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넘게 비만으로 살았다. 살은 먹으면 찌고, 열심히 움직이면 빠지는 게 이치였다. 단순한 걸 놓치며 살았다. 연초에 아주 잠시 품었던, 책을 내려던 욕망도 푹 내려놓았다. 일상의 글을 쓴 지 6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뇌의 연속이다. 한번은 내가 왜 이렇게 머리 아픈 일을 사서 하는지 고민해 봤다. 책을 내거나, 작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삶의 기억을 남기자는 게 내가 글을 쓰는 본질이다. 누군가에게 내보여도 창피하지 않게만 쓰면 되는 거라고 욕심을 비웠다. 힘을 빼고, 꾸준히 하다 보니 글은 한결 나아졌다.
남은 5분의 4는 '더하다.'를 염두에 두고 살 계획이다. 근력을 키워서, 몸을 탄탄하고 다부지게 만들고 싶다. 글도 꾸준히 써서 삶의 기록을 더 늘릴 것이다. 연말쯤 되면 지금보다 조금 더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있겠지. 다음 여행에 대비해 업무 지식도 쌓고 싶다. 신경림은 <길>이라는 시에서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살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여러 번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나는 세상살이 배울 기회를 절로 얻은 운 좋은 사람인가 보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괴로운 삶을 이겨 내는 비결을 터득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