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일정표의 9월 15일에 '능소화'라는 알람이 울렸다. 시골집에 갈 때 화분을 꼭 들고 가려고 저장해 둔 거였다. 무더웠던 여름, 어느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아내 지인을 만나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셨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얼마 전 여행에서 본 능소화가 너무 예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 당근(중고 물품 거래 앱)으로 시골집에 심을 묘목을 찾아본다고 했다. 며칠 후 지인은 내가 원하던 걸 들고 왔다. 아는 사람에게 자기가 키울 거라고 부탁해서 얻은 거란다. 작은 화분에 심어진 능소화 줄기는 젓가락보다 가늘었지만 튼실했고, 싱그러운 녹색 잎을 여러 개 달고 있었다. 시골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화분을 물로 촉촉이 적셨다. 흙이 떨어지지 않도록 비닐로 잘 싸서, 상처가 나지 않게 차에 실었다. 능소화를 심기도 전에 머릿속에는 이미 꽃이 피었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행복해할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목포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을 달려 시골집에 다다랐다. 동네 어귀에 핀 해바라기는 강렬한 해를 바라보기 힘든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는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아지랑이가 필 지경이었다. 헛간에 묶어 놓은 개들도 더위 때문에 맥이 빠져 보였다. 48년을 살면서 이렇게 더웠던 가을이 있었나 싶다. 거실에 계신 어머니께 인사부터 드리고 곧장 마당으로 나왔다. 흙이 좋고, 다른 식물의 간섭을 덜 받을 데를 골라 능소화를 심었다. 물도 흠뻑 주었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마와 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옷과 신발은 흙과 물이 묻어 지저분해졌다. 옷이라도 갈아입을 걸 그랬다. 호스를 잡은 김에 더위에 축 처진 꽃과 나무에도 물을 뿌렸다. 마당 구석에 있는 나무줄기와 잎이 낯익었다. 잎을 손으로 잡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나는 어머니에게 마당에 있는 게 능소화 아니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잘라도 잘라도 죽지 않고 해마다 나오는 걸 말하느냐고 했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내가 심은 걸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얻어다 심어 놓고 잊어버린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집에서 능소화나무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꽃이 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부모님은 꽃이 피는 여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왕성하게 자라는 줄기를 베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활짝 핀 능소화를 보았다면 이렇게까지 천덕꾸러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도 허망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주 오래 산 집에서 부모님은 해마다 능소화 줄기를 힘들게 베어 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주 귀하게 모셔 왔으니 말이다.
집에 막 들어온 아버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마당에 서 있는 내게 말했다. 어제 중뫼 고모가 돌아가셨다고. 고모는 아버지의 둘째 누나다. 그러면서 읍내 장례식장에 다녀오라고 했다. 장례식장 1층에 부고를 알리는 텔레비전에는 여러 고인의 사진과 가족 정보가 적혀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고모의 오래된 사진이 보였다. 고모 이름이 낯설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도, 친척들도 중뫼 사는 고모로만 불렀으니 그랬을 것이다. 고모 사진을 보는 순간, 눈물이 아주 살짝 핑 돌았다. 91세 드신 고모의 죽음은 내게 특별했다. 고모는 아버지의 5남매 중 가장 먼저 저세상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5남매 중 둘째인 고모는 막내인 78세 아버지와 외모가 많이 닮았고, 가장 가까운 데 살았다. 그래서 왕래도 잦았다. 장례식장은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조문객이 적어 한산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얼굴만 아는 고종사촌 형들과도 안부 인사를 나눴다. 고모는 치매를 앓았고, 일 년 넘게 요양원에서 지냈다. 가족이 헤어질 결심을 하기에는 넘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은 슬프다기보다는 평온했다. 어디 기쁜 죽음이 있겠느냐마는 저세상으로 가시는 게 훨씬 편안할 거라고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고모의 가족, 아버지, 고모까지도. 나는 음료수와 물 한 병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가장 무더운 추석을 앞두고 죽음을 맞은 고모를 추모하면서.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비슷한 일들을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무더위는 밤까지 이어졌다. 밤새 에어컨을 틀었지만, 자다 깨를 반복했다. 시계는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감밭에 그물 치는 걸 도와달라고 했었다. 오늘은 고모의 발인이다. 아버지는 "내가 뭣하러 거기 가,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오늘 말수가 적었다. 정이 많은 아버지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정이 밝지도 않았다. 손주들을 보고도 환하게 웃지 않았으니 말이다.
산기슭에 있는 밭에는 태추단감나무가 100그루쯤 있다. 태추단감은 배 맛이 나고 과즙이 풍부한데, 다른 단감과 달리 초록색일 때 딴다. 아버지는 감이 다 익을 무렵, 새가 쪼아 먹지 못하도록 나무에 그물을 씌운다. 나는 한두 시간이면 끝나겠지,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긴 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모자도 썼다. 아버지 트럭에서 그물을 내렸다. 감나무는 총 세 줄로 심어져 있었다. 날은 서서히 밝았다. 해가 다 뜨기도 전에 대지는 숨이 탁 막히게 달아올랐다. 아버지가 사방에 설치해 둔 스피커에서 온갖 동물 소리가 간헐적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고양이, 호랑이, 독수리까지 새들이 싫어할 만한 소리는 다 들리는 듯했다. 그게 큰 소용이 없다는 건 그물을 치면서 알 수 있었다. 새들은 이미 감 여러 개를 쪼아 놨다. 나는 그걸 따서 옷에 싹싹 문질러 베어 먹었다. 입안엔 과즙이 가득 찼고, 두어 개 먹으니 배가 불렀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일은 한 줄을 치는 데도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윗도리는 땀에 흥건히 젖었고, 허벅지는 산 모기들의 아침 식당이 됐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슬슬 짜증이 났다. 귀농하는 꿈은 오늘 완전히 포기했다. 손으로 그물을 치면서 머리로는 얼마나 벌 수 있을지 계산해 보았다. 경제학으로는 도저히 타산이 맞지 않았다. 이번에 치는 그물 값만 해도 몇백만 원이 넘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일흔을 넘기면서 논농사를 다 남에게 맡겼다. 이제 밭농사만 조금 짓는다. 농부로서 이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나 보다. 아버지 혼자였다면 하루 종일 해도 벅차 보였다. 그래도 오후 늦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사무실 직원, 처가 식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한 상자를 따 주었다.
아버지의 농사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지만, 경제적으로 따지면 효율성이 높지 았았다. 그래도 언제나 농사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땅도 사고, 집도 지었다. 자식 농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던 나를 끝까지 믿고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말단 공무원이 되었을 때는 가장 기뻐했다. 자식 농사가 풍년이 든 것처럼. 사무관이 되었을 땐 임명장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고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여주며 자랑했다. 아버지에게 감 농사가 돈이 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돈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나눠 먹으려고 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혹시 감 살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그날, 저녁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세 시에 일어났다.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보름달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별은 더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나는 어둠을 찾아 가로등이 없는 길을 2km쯤 걸었다. 하늘이 별로 가득했다. 우주의 별은 하늘을 항상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게 안 보였다면 내가 보려고 노력을 안 했거나, 빛 공해와 같은 것들에 잠시 가려져 있을 뿐이다. 인간의 마음,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종종 저지르곤 한다. 나는 시골집에서 돌아와서 배앓이를 했다. 더위를 먹었는지, 과식했는지, 음식을 잘 못 먹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번 가을과 추석이 무지 더웠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