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보리가 이삭을 틔우고 장끼가 우렁차게 울기 시작하는 오뉴월이 되면 아버지는 소를 몰아서 논을 갈았다. 어머니는 땟거리를 준비하며 노란 주전자를 내게 쥐여 주었다. 약 35년 전 막걸리 심부름은 초등학생이 된 내가 해야 했다. 점방 할머니가 가득 채워 주신 정을 온전히 가져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논두렁을 요리조리 걷다가 걸쭉하게 손에 묻은 막걸리는 달콤 씁쓸하고 시큼해서 딱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맛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안주가 있거나 농사가 고될 때 술을 석 잔쯤 드셨다. 아버지 주량을 가늠할 수 없지만 딱 이만큼이 좋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면 "저 녀석은 할아버지를 닮았다"라고 나무라셨다. 한 번 뵌 적 없는 할아버지가 노여워할지 모를 일이지만 나도 공감했다. 술을 이기려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다르게 나는 술을 너무 좋아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반복될수록 유전적으로 술이 셀 거라는 터무니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처음 술을 마신 건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다. 내가 빨리 술을 시작한 건 아니다. 시골에서는 중학생만 돼도 농사일을 돕기 때문에 약간은 어른 대접을 해서 술에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중학교까지 같이 다니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들과 담근 술을 몰래 나눠 마시며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때 친구들과 배운 술은 속을 쓰리게도 하고 젊음을 키워 낸 양분이 되기도 했다.
대학 시절 소주 댓 병을 라면 수프에 찍어 마시던 무용담과 배고픔으로 양념된 순대볶음 먹던 일들은 지금도 술안주가 되곤 한다. 졸업을 하고 배를 탈 때는 40도가 넘는 일터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살짝 언 맥주를 목에 쏟아부으면 심장까지 차가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빨갛게 불 타오르는 적도와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마시던 싸디 싼 위스키는 청춘을 더 뜨겁고 반짝이게 만들었다.
나는 유전자 덕분인지 심한 주사는 없었지만 가끔 깜짝 놀랄 실수를 했다. 첫 번째는 대학 시절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친구들과 두 달간의 방학이 아쉽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만들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술잔을 돌렸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눈을 떠 보니 시골집이었다. 목포에서 정읍까지 잃어버린 두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주머니에 남은 구겨진 열차표뿐이었다. 인간의 귀소 본능을 체험하며 안도와 허탈의 한숨이 나왔다. 두 번째는 결혼 후였다. 이 사건 이후로 집사람의 술 간섭이 심해졌다. 내가 맡았던 행사가 끝나 같이 주관했던 방송국 직원들과 뒤풀이를 했다. 술 좋아하는 상사들은 조직 위상을 술 세기와 직결시키곤 한다. 폭탄주를 많이 마시고 술자리에서 오래 버텨야 이기는 것이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받아 마셨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누군가 깨워 일어나 보니 아파트 잔디밭이었다. 새벽 3시경 호프 가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옆집 아주머니가 "아들과 닮은 사람이 쓰러져 있어, 보니까 옆집 신랑이야"하며 집사람에게 넘겨 주었다. 요즘도 복도에서 아주머니를 뵈면 가끔씩 그때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내는 내가 술 욕심이 너무 많다고 한다.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너무 급하게 마시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라며 신신당부한다.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보자면 배에서 다음 날 일을 위해 급하게 마시고 잤던 게 습관화된 것 같다.
나는 40대 중반이 되어 간다. 모든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다. 지금까지 젊음으로 용납됐던 술 실수도 이제는 용서받지 못한다. 가장으로 건강도 챙겨야 한다. 이제까지 할아버지처럼 용맹하게 술잔을 비웠다면 지금은 아버지의 지혜로 술잔을 채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