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닮은 얼굴

by 깊은 바다

정읍 시골집에 갈 때면 설레였다가, 돌아오는 길엔 늘 마음이 착잡해진다. 여든이 되신 아버지는 기력이 부친다며 쌀농사는 그만두었지만, 평생 몸에 밴 농부의 근성을 내려놓지는 못하셨다. 자식들 주겠다며 고추를 심고, 용돈벌이라며 단감나무를 돌본다. 아버지의 성근 머리카락 사이로 훤히 드러난 정수리를 볼 때면 속절없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언제 가도 정갈했던 집안은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못한 시간만큼 조금씩 먼지와 거미줄이 쌓여간다. 이제는 어머니는 혼자 서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장남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전화를 걸어 밥은 드셨는지 묻는 것뿐이라 마음 한편이 늘 아리다.


지난 화요일, 찬바람에 걱정이 앞서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는 줄포에서 연 고종사촌 만기 형의 딸 결혼 피로연에 다녀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말에 광주에서 결혼식을 한다니, 시간 되면 가 보라는 말도 건냈다. 그 목소리에는 자식 같은 조카의 마지막 경사를 챙기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만기 형은 나보다 열다섯 살 많은 예순다섯이다. 오래전 귀농해 정읍에서 흙을 일구며 살고 있다. 나는 형에게 27년 동안 묵혀둔 빚이 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우리 집엔 차가 없었다. 대학이 있는 목포에 가려면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형은 그날 전주에서 개인택시를 몰고 선뜻 내려와 주었다. 부모님과 우리 형제를 태우고 한 시간을 훌쩍 넘게 달렸다. 아버지가 대가를 치르마려 했지만, 몇 번을 손사례를 치다가 기름값이나 주라던 그 순박한 미소가 내내 잊히지 않았다.


형에게는 딸이 넷이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둘째 딸을 시집보내는 거라고 했다. 그간 세 번의 혼사에는 먹고사는 게 바빠, 혹은 시기를 놓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시골에서 형을 마주칠 때마다 미안함은 켜켜이 쌓여갔고, 이번만큼은 그 빚을 꼭 갚고 싶었다.


토요일, 광주로 향하는 한 시간 남짓한 길을 운전하는 내내 묘한 설렘이 일었다. 예식장에 들어서니 하객들 사이로 정장 차림의 만기 형이 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형수님 곁에서 손님을 맞던 형은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던 듯 나를 보는 형의 눈매가 더 정겹고 반가웠다.


결혼식장 뒷편, 식장 문 앞에 선 만기 형이 보였다. 곧 시작될 입장을 기다리며 딸의 손을 맞잡고 있는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유독 묵직해 보였다. 형의 눈가에는 서글서글하면서도 애틋한 아쉬움이 맺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낯선 형의 얼굴 위로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잔상을 보았다

.

생각해보면 우리 집안의 생김새는 참 묘한 길을 따라 흐른다. 아버지는 형제들 중 돌아가신 둘째 고모를 가장 많이 닮았고, 만기 형 역시 고모의 이목구비를 쏙 빼닮았다. 결국 고모라는 중간 지점을 거쳐, 형과 아버지는 한 줄기의 얼굴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평생 흙을 일구며 정직하게 살아온 세월만큼 까맣게 그을린 형의 피부. 그 투박한 피부 결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형은 얼굴뿐만 아니라,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그 고집스러운 성품까지도 아버지를 꼭 닮아 있었다.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형의 걸음걸이마다, 예전에 아버지가 걸으셨을 그 길과 마음이 겹쳐 보였다. 만기 형의 얼굴에 머물던 그 성글 성글한 아쉬움은, 어쩌면 아버지가 나에게 다 전하지 못했던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만기 형은 아버지의 논농사를 대신 짓는다. 그 댓가로 매년 쌀을 몇 가마씩 준다. 우리 남매는 만기 형이 지은 쌀을 먹으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27년 전, 목포로 달려 주었던 형의 택시처럼, 나 또한 형의 기쁜 날을 향해 달려온 오늘, 형의 빛나는 환한 미소를 보니 비로소 마음에 오래 고여 있던 해묵은 빚을 조금은 덜어낸 듯 홀가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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