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0.
초등학교 방학 때면 한 달 가까이 서울 큰집에서 지냈다. 세 명의 여동생보다는 사촌 형제들과 통하는 게 많았다. 할머니도 막내아들의 장남인 나를 방학이 되면 꼭 불렀다. 할머니는 평소 챙겨 주지 못한 게 안타까웠는지 제사에 쓰던 곶감 같은 것들을 숨겨 뒀다가 내게 몰래 주곤 했다. 그리고 집에 내려갈 때는 만 원짜리 한두 장을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몇 년이 지나 한 번은 용돈을 하라며 70원을 주었다. 할머니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몇 달 후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시장에서 장사하던 큰아버지가 여러 가지 이유로 할머니를 모시기 힘들다며 부탁한 것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떠안게 된 것이 기가 찼던지 그동안의 설움을 모두 기억해 냈다. 큰집이 서울로 이사 가기 전 농번기에 큰집 애들만 봐줬던 일, 유산을 분배할 때 작은 아들이라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일, 사소한 모든 것들이 이유가 됐다. 하루가 멀게 부모님은 다퉜다. 결국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갔지만 어머니도 독하지만은 않았다. 할머니가 큰집 지하 방에 갇혀 지내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다시 모셔 왔다. 그렇다고 갈등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5년간 수발했고 아버지는 고부 사이의 모든 고통을 감내하셔야 했다. 할머니는 98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배를 타고 있어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한국에 와서 소식을 듣고 슬프긴 했으나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촌 형제들과의 술자리에서 쏟아졌다.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했던 마음, 가끔은 모질게 할머니를 대했던 어머니를 향한 분노, 무책임하게 할머니를 떠안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불평, 모든 감정의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버지는 한 번도 큰아버지와 할머니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고통의 크기는 어머니가 훨씬 컸다. 작은며느리라서 책임이 조금은 가볍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힘들게 했다. 나는 어머니의 불만이 계속되자 한 번은 아버지께 화를 냈다. 큰아버지는 서울에 2층 집에 살면서 아버지에게 소작료까지 꼬박꼬박 받아가는데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는 게 불합리하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라면 어떻게 할래?"라며 물었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 탓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농사를 지어야 했다. 사우디에 나가서 건설 노동을 하고 때로는 시장에서 짐을 나르며 부지런히 사셨다. 그러나 시골 살림은 노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 사는 돈을 아껴 자녀 교육과 시집 장가를 보내는 데 쓰셨다. 본인을 위한 낭비라고는 오로지 담배를 피우는 것뿐이었다.
그 소소한 사치 탓에 아버지는 60대 초반 침샘암을 진단받았다. 의사들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말을 한다. 그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봤다. 그동안의 쌓인 아픔과 고통을 한 번에 쏟아 내는 것 같았다. 이제 손주를 보고 조금 살 만하다 했는데 말을 못 할 수도 있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회복 기간 동안 큰아버지는 거의 매일 한 시간 가까운 거리를 몸에 좋다는 음식을 들고 찾아오셨다. 할머니는 어쩌면 형제의 우애를 더 두텁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의사의 기우와는 다르게 후유증 없이 10년 넘게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작년에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힘든 일을 내려놓으셨다. 아버지는 사랑 표현에 인색했다. 아니 방법을 모른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집사람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아버지는 처음으로 속을 나타냈다. 아들이 고모들에게 큰집 조카들보다 사랑을 받지 못해 안타까웠던 마음, 비록 말단이지만 마을에서 처음으로 국가직 공무원이 된 아들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가끔은 손해만 보고 초라하게 살며 누추한 옷차림의 아버지가 창피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아빠가 되어 보니 내 부끄러움의 깊이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버지만 사랑을 드러내는 데 서툰 것은 아니었다. 이제 용기 내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