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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02. 2019

잘난 에이 반의 추억

2019. 10. 01.



‘잘난 에이 반’, 대학 시절 우리 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민족 고대, 해방 이화, 자주 경희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소소한 투쟁으로 얻은 값진 별칭이다. 목포해양대학교 기관공학과는 한 학년이 160명이나 돼서 네 반으로 나뉘었다. 같은 반이 되면 반강제적으로 4년간 숙식을 함께 한다.

해사대학은 졸업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그곳을 승선생활관이라고 한다. 상선 사관의 자질을 키우려고 선박과 비슷한 환경에서 지내게 한다. 방은 항상 청결해야 하고, 욕실과 화장실은 물기가 없어야 한다. 고립된 공간에서 잘 걸리는 질병을 예방하고 흔들리는 배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막으려는 교육의 일종이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아침저녁으로 하는 빡빡한 점호도 마찬가지다. 상륙이라 부르는 외출 허가도 까다로워서 선원의 가장 큰 적인 고독과 친해지게 된다. 꼼꼼한 복장 점검을 통과해야 하고 통금시간도 있어 평일은 대부분 안에서 지낸다.

수업이 없는 금요일 오후부터 집에 가거나 동기들끼리 놀러 나간다. 당직사관이 누구냐에 따라 인원은 크게 변한다. 어떠한 상황에도 좀체 나가지 않는 친구들을 ‘해대 곰팡이’라고 부른다. 애인도 없고, 집도 멀며, 술도 싫어하는 친구들은 삼시 세끼를 챙겨 주는 이곳이 최상의 생존 환경인지 모른다. 거기다가 점호도 느슨해지고 선배들의 간섭도 줄어드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나는 다행히 그 신세는 면했다.

귀관은 일요일 저녁에 했다. 무궁화호에서 내리면 해대 1학년들의 마음을 후벼 파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들려왔다. 그날은 유난히도 노랫소리가 더 서글펐다. 평소보다 쉽게 점검을 통과하고 들어왔는데,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반 친구들이 탈사를 한다고 했다. 해대에서 생활관을 허락 없이 나가는 것은 항해하는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았다. 몇몇 친구들이 같이 나가자고 종용했다. 이미 선발대 몇 명은 무안에 거처를 정했다고 했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담을 넘었다. 가슴이 뛰었다. 머리도 멍해졌다. 무안 가는 버스에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무안터미널 주변 여관에서 친구들과 합류했다. 이십여 명이 모였다. 다들 경황이 없고 경직되어 있었다. 반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어젯밤 2학년 선배가 생활관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단다. 그는 술에 취해 같은 층을 쓰는 우리 반 곰팡이들에게 밤새 심한 폭력을 휘둘러 던 것이다. 선배들이 예전에도 가뭄에 콩 나듯 괴롭힌 적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여러 가지 대책도 준비했다. 선배의 사과와 학교 측의 폭력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자는 것이었다. 학교도 발칵 뒤집혔다. 집단행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감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여관으로 왔다.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 방안도 제시했다. 그렇게 작은 ‘민주화 운동’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며칠 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선배의 반성도 생활관 제도의 개선도 아니었다. 1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강도 높은 특훈이었다. 우리는 ‘잘난 에이 반’을 외치며 기합을 받아야 했다. 특히, 우리 반이 집중 포격 대상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동기들이 신음소리를 내고 심지어 쓰러지기도 했다. 다들 비 오듯 땀을 흘렸다. 다른 과 친구들은 우리들에게 불만보다는 할 일을 했다고 다독여 줬다. 바로 해대 동기의 힘이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우리가 선배가 되고 나서 사적인 폭력은 대부분 근절되었다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기도 했지만 악습과 싸운 열사들의 사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대학은 선후배 간의 관계가 돈독하기로 유명하다. 서로 간의 믿음과 존경, 사랑은 지금의 학교가 존재하고 성장하는 원동력이었다. 끝내 용서받지 못한 선배도, 승선생활관의 폐습도 이제는 안줏거리로만 남았다. 가장 난폭한 권위를 폭력이라고 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악과 맞섰던 '잘난 에이 반'의 그날 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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