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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Nov 16. 2019

모범공무원

2019년도 상반기 모범 공무원으로 선정됐다. 수여식은 조촐했다. 부서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방청장님이 모범 공무원증을 주고 왼쪽 가슴에 표장을 달아 주었다. 홍보 담당자는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모범 공무원은 6급 이하 공무원 중에서 선발되는데, 국무총리 표창과 3년간 수당을 준다. 실무직 공무원에게는 최고의 상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선발되려고 선거 후보자의 약력 쓰듯 온갖 공적을 다 내긴 했다. 막상 되고 나니 부담감이 기쁨을 억눌렀다. 과연 내가 자격이 되는지 되돌아봐졌다.

2002년, 약 3년간의 승선 생활을 끝냈다. 육상 일자리를 구하는 게 만만치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곳저곳 방황하다 친구 따라 부동산 영업을 했다. 호객 행위도 해야 했다. 어느 순간 내가 한심스러웠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마침 해기사 특채로 공무원이 된 친구들이 있었다. 문제는 뽑는 인원이 적을 뿐 아니라 채용 시기도 그때그때 달랐다. 무작정 공부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천운처럼 해양경찰청 일반직 채용 공고가 떴다. 공무원 시험은 대학 시험과 달랐다. 떨어지면 낭인이다. 궁지에 몰리니 절실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시험 과목이 전공 과목이어서 수월했다. 삼당사락의 각오로 집중했다. 공부도 이상하게 재밌었다. 아버지가 내 사주에 관운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사소한 것도 힘이 됐다. 마침내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있었다.

2003년 12월 29일, 지금도 잊지 않는 날이다. 삼학도에 있던 목포해양경찰서로 첫 출근했다. 해양 오염 예방과 방제 업무를 했다. 2007년 태안 허베이스피리트호, 2014년 여수 우이산호 사고에 투입되어 사무실과 현장을 오갔다. 검은 기름으로 뒤덮인 바다가 내 노력이 더해진 작업으로 제 모습을 찾는다. 사고 처리가 힘들긴 하지만 깨끗해진 바다를 보면 보람과 자부심을 느낀다. 처음 입사해서는 덤벙댄다고 지적을 많이 받았다. 실력이 탁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

임용된 지 10년 만에 인천에 있는 본청으로 발령이 났다. 목포를 떠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곳에 너무 오래있었고 진급도 해야 했다. 전임 과장님이 계장으로 있는 곳에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좋은 기회였다. 국(局) 주무 서무를 했는데, 새로운 환경과 업무가 낯설었다. 거기다 까탈스러운 상사를 모시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과장님은 많은 직원들 앞에서 목포로 다시 내려 보낸다며 모욕을 줬다. 발령 내주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지만 쓴 약 먹듯 삼켜 버렸다. 과장님은 1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나를 인정해줬다. 그리고 승진하는 데 가장 큰 힘을 실어 줬다. 악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 지금은 퇴직을 하셨지만 가끔 연락한다. 그렇다고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다.

진급해서는 예산 업무를 했다. 매사에 방어적으로 나오는 기획재정부 담당자를 설득해야 했다.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던 그도 거의 매일 찾아가는 정성과 노력에 감동했는지 요구액 전부를 반영시켜 줬다. 좀더 같이 근무하자는 상사의 제안이 있었지만 가족을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삼 년 만에 다시 목포로 내려왔다. 지방에서는 여유가 있었다.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침에 한 시간씩 책을 읽었다. 2년 동안 대략 100권을 봤다. 평생 읽은 책의 두세 배다. 독서 토론 모임에 나가려고 그 어렵다는 아베르 카뮈의 >를 3번이나 읽었다. 말을 잘하고 싶어 평생교육원에서 스피치를 배웠다. 특히, 글쓰기를 배운 게 큰 도움이 됐다. 글을 쓰다 보니 문법부터 띄어쓰기까지 살펴본다. 문서를 작성하면서 실수가 줄고 내용도 충실해졌다. 내가 모범 공무원이 되자 후배들은 기뻐했다. "반장님은 충분한 자격이 있어요."라는 말은 그 어떤 축하 인사보다 값졌다. 물론 빈말일지도 모른다.

올해로 공무원 15년 차가 됐다. 이제 직장에는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다. 후배에게 본보기가 되는 선배가 되고 싶다. 질책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 책을 가까이 하며 논리 정연한 글을 쓰고 따뜻한 말을 할 수 있는 동료이고 싶다. 삶과 업무의 지혜를 줄 수 있는 그들의 영원한 '모범 공무원'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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