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이 끼었을까! 싼 표에 또 발동이 걸렸다. 그 기준은 나름 명확하다. 목포에서 서울 가는 케이티엑스(KTX) 가격이다. 주식처럼 오르락내리락하던 항공권 가격이 출발 3일 전에 원하던 수준까지 내려왔다. 회사에 특별한 일도 없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준비 시간은 촉박하지만 결제부터 한다. 대만 여행 최적기는 11월이란 정보도 한몫했다. 아내와 4박 5일(11. 10. ~ 11. 14.) 동안 여행하는 것은 그렇게 시작됐다.
<무안-타이페이 항공권>
자유 여행은 계획부터 귀국 때까지 많이 긴장하고 몰입해야 한다. 숨은 맛집이나 멋진 장소를 발견하면 어린 시절, 보물 찾기에서 하얀 종이를 찾은 기분이다. 패키지여행과는 다른 매력이다. 일정 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버스 투어가 활성화되어 있고 엠알티(도시 지하철)도 잘 갖춰져 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추천해 주는 곳도 비슷했다. 둘은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빠듯하게 갈 곳을 정했다.
11. 10. 13시 40분 비행기다.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무안공항에서 출발하니 여유롭다. 비행 편이 적어 출국 수속도 수월하다. 비행기 창가로 앉는다. 기체가 폭발적인 속도로 솟아오른다. 하얀 구름이 빙하처럼 온 세상을 뒤덮었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책을 꺼낸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다. 회사에서 읽었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다르다. 작가는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아빠 그리고 직장인에서 잠시 탈피한다. 관광객일 뿐이다. 해외여행에 중독되는 이유 중 하나다.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시차 조정으로 14시 40분이 된 전자시계를 보니 시간을 선물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여행의 이유>
대만의 첫인상은 무질서와 질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느낌이었다. 첫째, 오토바이 문화다. 도로에는 오토바이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인구 대비 보유 대수 세계 1위다. 나라는 작고 사람은 많기 때문에 국가에서 장려한다. 영상 10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날씨도 이유다. 파란 신호라고 해서 안심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안 된다. 보행자를 아슬하게 피해 가는 오토바이를 쉽게 볼 수 있다. 반면에 모든 탑승자는 헬멧을 쓴다. 오토바이도 주차선에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주차한다. 차와 뒤엉켜도 경적을 듣긴 힘들다. 둘째, 도시가 깨끗하다. 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며 걷는다. 역 근처에는 부랑자도 많다. 당연히 지저분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강력한 단속과 정기적인 청소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만이 다는 아닐 것이다. 내가 모르는 이 나라 특유의 국민성이 있는 것 같다.
<타이페이의 오토바이>
타이베이 메인 역 근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대만의 명동이라는 시먼딩 시내를 둘러봤다. 저녁은 유명 식당의 대왕 연어 초밥을 먹기로 했다. 식당 앞에 줄이 길게 서 있다. 대부분 한국인이다. 대기표를 주는데, 한 시간 있어야 우리 차례다. 다행히 주변에 용산사가 있다. 절을 둘러보지만 마음은 그곳에 있다. 8시가 넘으니 허기도 지고 몸도 피곤했다. 사실 출발 전부터 임파선이 부어 몸 상태도 안 좋았다. 다시 식당에 도착해 10분 정도 기다리니 우리 순서다. 연어 초밥은 크기만큼이나 먹음직했다.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코끝이 아려 온다. 이 집만의 조리법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느끼기엔 고추냉이가 많이 부담스럽다. 호불호야 있겠지만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단골 초밥 집의 점심 특선이 그리워졌다.
<연어 초밥과 용산사>
둘째 날은 화련을 여행했다. 대만에서 4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인 타이루거 협곡을 돌아본다. 기차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일주일 후까지 예약이 끝나 버렸다. 아쉬운 대로 버스 투어를 하기로 했다. 가끔 주요리보다 기대하지 않던 부요리가 풍미를 더해 줄 때가 있다. 왕복 6시간 버스에서 가이드가 틀어 준 대만 영화가 그랬다. 가면서는 단수이를 배경으로 하는 주걸륜 감독의 <말할 수 없는 비밀>, 오면서는 풍등으로 유명한 스펀이 나오는 구포도 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봤다. 같은 로맨스 영화지만 결말은 극과 극이다. 무질서와 질서처럼 어울리진 않지만 어색하지도 않은 이것이 '대만스러움'일까?
<버스에서 본 대만 영회>
<타이루 협곡 가기 전 청수단애>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만의 역사도 조금 알게 되었다. 단수이 홍마오청에는 대만을 포함하여 9개의 국기가 있다. 이곳을 점령했던 나라다. 태평양과 가까워서 여러 나라의 식민지가 됐었다. 일본은 수많은 지배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두 나라 사이가 좋은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고 한다. 이동 시간을 잠을 자거나 무료하게 보낼 때가 많았다. 갈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니 여행의 맛이 더 우러났다.
타이루거 협곡을 보면 중국 수묵화가 떠오른다. 백양 폭포까지 왕복 4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협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 인류의 조상이 숲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숲에 친근감을 느낀다."라고 했다. 산길을 걷다 보면 큰 숲이 나를 보듬은 것 같아 평안해진다. 계곡의 힘찬 물소리는 심장을 뛰게하고 머리를 맑게 한다. 하루 정도 여유를 두고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타이루 협곡의 백련 폭포>
<타이루거 협곡>
셋째 날은 유명 관광지 다섯 곳의 첫 글자를 딴 '예스폭진지' 버스 투어를 했다. 스펀에서는 풍등에 건강, 희망, 재물, 사랑을 주제로 소원을 적었다. 글쓰기 반에서 글감을 받은 듯했다. 멋진 글을 쓰고 싶었지만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공부 잘하게 해 달라는 상투적인 문구만 떠 오른다. 집사람은 글쓰기 배우러 헛다녔다며 비웃는다. 창피함은 순간이다. 불을 붙이자 소원이 푸른 하늘로 솟구친다.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다. 아! 그런데 버스에서 본 영화에서는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졌다.
<에스폭진지 버스 투어>
넷째 날은 일정이 빠듯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다행히 숙소 주변에 대만 고궁박물관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개장 시간에 맞추어 가니 여유롭다. 취옥백채와 같은 보물이 좋았지만 수박 겉핥기인 것같아 아쉬웠다. 다음은 단수이에 갔다. 네덜란드가 점령했을 때 지은 건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 유럽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대부분이 학교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데, 건물도 사람의 숨결과 함께해야 잘 보전되는 것 같았다.
<단수이와 대만 고궁박물관 취옥백채>
융캉제로 이동했다. 홍대 거리와 비슷하다. 딤섬으로 유명한 딘타이펑 본점이 있다. 오후 3시 30분 정도 도착했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꽤 있다. 여러 국적의 사람이다. 조금 후에 한국어 안내가 나온다. 내 순서다. 그 식당은 맛도 맛이지만 직원들이 친절했다. 집사람에게 여 종업원들이 연예인처럼 예쁘다고 했더니, 눈을 흘기며 여기까지 와서 여자나 보고 있다며 나무란다. 어떤 직원이냐고 묻길래 가르쳐줬더니 눈이 참 낮다고 다시 한 번 쓴소리를 한다. 내가 "그래서 당신을 만났을까?" 하며 농담을 걸자, 아내는 "나를 만나고 나서부터 눈이 낮아지고 있다."며 웃는다.
<딘다이펑의 딤섬>
다음은 중정 기념당이다. 대만 역사와 국민 정서를 이해하려면 꼭 둘러 봐야 한다. 이곳에서는 대만 초대 총통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로 추앙받는 장제스를 기린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독립을 지원해서 그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우호적이었다. 양국은 45년간 유지하던 외교 관계를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대만에 단교하면서 끝냈다. 당시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문제는 한국의 일방적 선언이 대만 국민에게 큰 상처를 남긴 것이다. 이전까지 대만의 혐한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류 열풍 덕에 그 분위기는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쌍방이 외국인 관광객 3위 방문국이고 여행 중에도 불편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중정기념당>
샹산 전망대에 올라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인 101 타워의 야경을 보며 여행을 회상해 본다. 1590년 동방 무역을 하려고 이곳에 진출한 포르투갈인은 대만을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모사(Formosa)라고 명명했다. 이곳은 영화 제목처럼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곳 같았다. 벼락치기 여행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관심을 두고 꾸준히 공부를 하면 충분히 풀 수 있을 것이다.
<샹산 전망대에서 본 타이페이 101타워>
마지막 날은 오전에 숙소 근처의 디화제 거리를 둘러보았다. 약재상들과 선물가게가 밀집되어 있다. 시장과 노점 식당들도 있다. 현지인들과 함께 간이 의자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지 상인마다 일본어로 인사를 건넸다. 한 상인이 물건을 팔면서 싼 과자는 사무실 동료에게, 좋은 쿠기는 가족에게 주라고 한다. 마음을 읽힌 것 같아 무안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비행기가 15시 40분 출발이라서 여유를 두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디화제 거리>
돌아오는 비행기는 시간을 거슬러 온다. 대만에서 받은 한 시간도 돌려줘야 한다. 아빠와 직장인, 즉 일상으로 돌아온다. 가라앉는 태양 주위로 노을이 펼쳐진다. 어둠 사이로 남쪽 하늘에서 화성이 보인다. 별도 아닌 것이 별보다 더 반짝인다. 내 여행의 이유는 무엇일까? 해독이다. 머릿속에 잡념과 스트레스 같은 독소는 비운다. 그 무게와 크기만큼 여행지의 아름다운 것들과 매력으로 채운다. 20년 만에 다시 찾은 대만은 내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