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걸이와 글쓰기
올해 초부터 철봉만 보면 매달렸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43년 살면서 턱걸이 하나를 제대로 못 했다. 작년부터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해서 두세 개는 하겠지 했는데 착각이었다. 수십 년간 못 한 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먼저 유튜브를 보고 요령을 배웠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팔 힘으로 몸을 철봉까지 당겨야 하니 살을 빼야 했다. 그리고 꾸준히 연습만 하면 된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웠다.
하루 대여섯 잔 마시던 믹스커피부터 끊었다. 오후만 되면 단 게 당기더니 한 달 정도 지나니 참을 만했다. 휴일에는 삶은 달걀 몇 개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틈만 나면 걸었더니 몸이 가벼워졌다. 다행히 관사 놀이터에 철봉도 있었다. 누가 볼까 봐 이른 새벽과 늦은 밤에 주로 했다. 사람이 있으면 길고양이처럼 주변을 어슬렁대다 들어온 적도 여러 번이다. 몇 분씩 짧은 시간이지만 꾸준히 자주 했더니 다섯 개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대낮에도 당당하게 매달린다. 같이 사는 동료가 보더니 감탄한다. 살짝 웃고 만다. 턱걸이를 계속하니 나만 아는 가슴 근육도 나온다. 뱃살이 들어가는 건 덤이다. 샤워하고 나서 거울을 자주 보게 된다. 턱걸이를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턱걸이는 작년부터 배운 글쓰기와 많이 비슷했다. 첫째는 시작이 어렵다. 회사에서 문서나 보도 자료를 자주 만들지만 내 일상을 쓴 건 초등학교 일기가 마지막이었다. 유시민이나 강원국 같은 달변가의 공통점 중 하나는 글을 쓴다는 점이다. 토론에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능력에 매료되었다. 첫 글감은 '글쓰기를 하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잠들기 전 천장은 원고지가 된다. 등대 없는 항구 같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이 완성된다. 헤밍웨이도 "글은 죽치고 앉아서 쓰는 수밖에 없다."라고 했단다. 다 쓰고 나면 창작의 희열을 느낀다. 누군가 칭찬이라도 해 준다면 그 기분은 배가된다. 목표했던 턱걸이 개수를 채웠을 때와 비슷하다.
둘째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처음 썼던 글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번역투에 비문이 넘쳐난다. '한 잔'과 '한잔'의 의미도 몰랐으니 오죽했겠는가. 글쓰기 스승이신 이훈 교수님은 "잘 쓰자면 문법을 포함한 말은 물론이고 내가 다룰 대상의 성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라고 가르치신다. 잘못된 문장을 쓴 학생들을 혼낼 때면 나까지 민망해졌다. 교수님은 단체 카톡방에서도 띄어쓰기를 지적한다. 내 스마트폰에 한글 사전이 깔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제는 어려운 띄어쓰기를 제대로 한 기사나 공문을 보면 오랜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 잘못된 동작으로 턱걸이를 하면 오히려 몸에 해를 끼친다. 글도 잘못 쓰면 오해를 부른다. 기본이 탄탄해야 오래간다.
마지막으로 꾸준히 해야 한다. 턱걸이는 철봉이 보이면 한다. 때로는 찾아서 한다. 긴 시간은 필요 없다. 할 수 있을 만큼 하고 내려오면 된다. 좀 더 버티고 자주 하면 실력이 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연필만 있으면 된다. 일상에 관심을 두고 깊이 관찰하면 모든 게 글감이 된다. 글을 쓰려면 깊고 넓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응어리졌던 감정과 오해가 풀리기도 한다. 때로는 즐거웠던 일을 추억할 수 있게 하고 타인과 소통하게도 한다. 자주 쓰다 보면 글의 '힘'이 생긴다. 내 생각을 탄탄하고 조리있게 만든다. 글쓰기는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정 운동이다.
인천으로 발령이 나면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였다. 코로나 때문에 목포에서 다니던 '일상의 글쓰기'는 폐강됐다. 이훈 교수님은 나 같은 제자들이 안타까웠던지 재능 기부로 매주 영상 수업을 한다. 교수님은 성의를 안 보이면 쫓아낼 거라고 한다. 그 성의는 교수님이 내준 글감에 따라 열심히 글 올리는 거란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면 턱걸이를 해야겠다. 그리고 지금 쓰는 글을 열심히 고쳐야겠다. 턱걸이와 글쓰기는 노력을 배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