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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May 19. 2020

허리 삐끗한 날

허리 삐끗한 날

창틈으로 여명이 스민다. 미세한 빛에 눈이 뜨인다. 5시 20분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거려 본다. 잠은 어둠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관사에서 보내는 휴일은 온전한 내 것이다. 허투루 보내는 게 아깝다. 고양이 세수만 하고 집을 나선다. 가까운 동산에 오를 요량이다.

파란 하늘과 신록은 눈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우렁차고 활기찬 새소리는 귀를 맑게 한다. 절정에 이른 봄 산의 매력을 만끽하며 한 시간쯤 걸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돌아올 일이 걱정된다. 먼저 보이는 하산 길을 선택했다.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길이 사라졌다. 공사 때문에 등산로를 막는다는 안내판이 보였다. 주변은 철조망으로 에워쌌다. 금강산이라도 내려 온 산을 다시 올라가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개구멍으로 기어 나가자니 공사 관계자에게 걸리면 망신이나 당할 것 같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좀 더 찾아보니 도로와 연결되는 산턱이 나왔다. 어른 키보다 살짝 큰 높이다. 잘만하면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밑에서 담배를 피던 동네 아저씨도 해 보라고 부추긴다. 이미 결정은 내려졌다. 충격을 적게 하려고 스파이더맨처럼 매달린 상태에서 몸을 던졌다. 나름 착지도 괜찮았다. 10점 만점에 7점은 받을 만했다. 아저씨도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짓는다. 문제는 다음 날 일어났다.

아침에 깨어 보니 찌뿌듯했다. 허리가 좋지 않아 칠 년 전에 심하게 고생했고, 수영을 해서 겨우 좋아졌던 게 떠올랐다. 징검다리 연휴라 목포 집에 내려왔다. 집사람에게는 허리가 아픈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돌아올 답이 뻔해서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의사도 아내와 같은 질문을 했다. 두서없는 핑계가 듣기 힘들었던지 엑스레이나 찍어 보잔다. 방사선사는 사진을 보더니 직업이 뭐냐고 물어본다. 당연히 상태가 심각해서다. 의사는 결과를 보며 처방을 듬뿍 담아 독설을 날렸다. 앉아 있는 자세부터 지적하더니 나아질 방법은 별로 없다고 했다. 열심히 걷기나 하란다. 씁쓸함을 가슴에 담고 집에 돌아왔다. 집사람에게는 결과를 완곡하게 얘기했다.

그날은 유튜브로 ‘허리 좋아지는 법’만 찾았다. 허리 디스크 환자가 하지 말아야 할 자세를 찾아보니 전부 내가 하는 행동이었다. 양반 자세와 푹신한 소파에 앉아 한두 시간씩 책을 보고, 주말이면 10시간씩 버스를 타고 목포와 인천을 오갔다. 십수 년 직장 생활 대부분을 앉아 일했다. 걷는 자세가 이상하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허리를 혹사시킨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허리 디스크 환자는 2014년 약 128만 명에서 2018년 약 164만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아프고 나니 주변에 허리 안 좋은 사람들만 보였다. 나보다 더 고생하는 직장 동료도 있었다. 다들 열심히 살아가면서 얻은 삶의 상처일 것이다.

그때부터 한 시간을 앉자 있기 힘들었다. 동영상으로 배운 스트레칭을 하면 그나마 조금 나았다. 아내에게 부탁해 허리에 좋다는 등받이 쿠션도 샀다. 다행히 회사 주변에는 큰 공원이 두 개나 있어 아침저녁으로 걷기에 좋다. 발에 땀이 나도록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자면서도 허리가 불편해 몇 번이고 깬다. ‘건강은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안다.’라는 말이 정답이었다.

허리가 이렇게 된 건 잘못된 습관 탓이 크다. 동생들도 그런 걸 보면 가족력도 있는 것 같다. 이제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건 힘들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아침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간을 아껴 가며 열심히 운동하라는 몸의 신호 같다. 비록 허리는 안 좋아졌지만 가끔은 힘들더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얻은 '허리 삐끗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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