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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04. 2020

코로나 19 추석 단상

코로나 19 추석 단상

열 살 무렵, 그러니까 30년도 지난 일이다. 추석이 오면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큰집에 갔다. 십 리쯤 되는 두툴두툴한 자갈길을 달릴 때면, 아버지의 허리를 꼭 껴안아야 했다. 그 등은 가을 햇볕을 품은 듯 따뜻했다. 몸에 밴 담배 냄새도 싫지만은 않았다. 엉덩이가 아프긴 했지만, 사촌 형제들과 놀 생각을 하면 참을 만했다. 누렇게 물든 들녘을 가로질러, 실개천 다리를 건널 때면 할머니는 어떻게 알았는지 양천동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큰집에서 자면 수탉 울음소리에도 눈이 떠졌다. 그리고 곧장 뒷마당으로 갔다. 할머니보다 빨라야 했다. 아버지가 젊어서 심은 밤나무 두 그루에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야 해서다. 구석구석 숨겨진 보물을 찾는 기분이었다. 갓 떨어진 밤은 색이 선명했고 윤기가 흘렀다. 네다섯 개 주우면 두 손으로는 부족했다. 주머니까지 가득 채워 큰어머니에게 가져다주면, "성훈이는 참 부지런하구나"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모아 제사상에 올리고, 겨울이 되면 아궁이에 구워 8명이나 되는 친손주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그 칭찬을 듣고 군밤을 맛본 건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다음 해 밤꽃이 필 무렵 큰집은 서울로 떠나 버렸다.

공부를 잘하던 사촌 형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결정한 일이었다. 추석이 되면 공허함을 느낀 건 그때부터였다. 설은 큰집에서 쇘지만, 추석은 달랐다. 조상의 묘가 대부분 양천동에 모여있었다. 시장에서 과일을 팔던 큰아버지는 대목 장사를 포기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성묘가 제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따로 지냈다. 그때부터 이십여 년 넘게, 내 아들이 걷기 전까지 아버지와 단둘이 다녔다.

중학생이 되면서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그 등은 여전했지만 추석을 보내는 느낌은 달라졌다. 십여 명씩 모여 다니는 성묘객들을 만날 때면 왠지 초라해졌다. 친척의 차로 다니는 친구를 보면 더 그랬다.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여동생들이 부러웠다. 절하는 시늉만 하고 대충 따라만 다녔다. 어린 마음에도 난 맏집 장손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갈 때마다 설명을 들어도 어떤 조상의 묘인지 외우기 힘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랬다. 우리 집만 마을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것 같았다. 이웃집이 손님들로 시끌벅적해지면 더 우울해졌다.

이 증세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나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넘게 배를 타면서 확연히 좋아졌다. 이 시절 추석은 바다에서 보냈다. 스무 명이 넘는 선원들은 음식을 차려 놓고 차례를 지냈다. 외국 선원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고향에 계신 부모님, 용왕님,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했다. 대상은 달랐지만 소원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맛있는 것을 나눠 먹고, 술을 마시며, 노래도 부르다 보면 긴 항해에 쌓인 스트레스가 풀렸다.

아내는 조용하게 지내는 명절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했다. 처가와 다르게 우리 집은 차례상을 차리지 않는다. 음식도 전이나 홍어 무침 같은 한 두 가지만 더 만들 뿐이다. 손님도 거의 오지 않아 우리 식구만 먹으면 끝이었다. 오히려 여동생 세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오면 더 거추장스러웠다. 몸이 불편해진 어머니는 제발 따로따로 오가 아니면 오지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마을 전체가 조용한 추석을 보냈다. 명절 때마다 번잡스럽던 옆 집 할머니내는 막내아들만 내려왔다. 외지에 사는 친구들도 이번에는 대부분 내려오지 않았다. 내 여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에 두세 번 보는 손주들이 어찌 그립지 않겠느냐마는 어른들의 마음은 이 잔혹한 질병을 이겨내고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오후에 아버지 휴대전화로 070이 찍힌 전화가 왔다. 아내와 나는 사기 전화라며 끊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번호가 낯익다며 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미국으로 간 사촌 형의 추석 안부 인사였다. 나는 유튜브로 형의 얼굴을 자주 본다.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고, 가끔 댓글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어제도 본 것만 같았다. 형은 한국에 다녀가고 싶어도 코로나 19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수업도, 회의도, 명절 인사도 컴퓨터와 휴대전화로 하는 시대가 돼 버렸다.

이번 명절에는 많은 사람이 귀성을 포기했다. 정체된 차에서 뿜어내는 매연, 과도하게 버려지는 음식은 조금 줄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경고일 것이다. 환경을 지키면서, 질병도 이겨 내고, 정도 넘쳐나는 명절을 보내는 것은 우리가 해결해 할 어려운 숙제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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