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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 바다 Oct 10. 2020

바다에서 보낸 청춘

배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바다보다 파란 하늘에서 강렬한 햇빛이 쏟아졌지만,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땀과 기름으로 범벅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아내와 갓 돌이 지난 아들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 멀리 그리고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다시 공무원 시험을 볼 수나 있을지 걱정됐다. 그렇다.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다시 선원이 돼 있었다.

배에서 내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자꾸 이런 꿈을 꿨다. 몸이 좋지 않거나 술을 많이 마시면 더 그랬다. 힘들게 잠에서 깨면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어졌다. 그날은 오전 내내 정신이 멍했고 몸은 찌뿌둥했다. 20대의 절반 가까이 보낸 바다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곳 같았다. 거기다가 선원,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관사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직업이었다.

스물셋이 되던 1999년, ㅁ해양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이엠에프(IMF, 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로 실업자가 늘어나고 취업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해운계는 다행히 충격의 여파가 미치지 않아 어렵지 않게 큰 선박 회사인 ㅂ 상선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뻤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 3학년 때 1년간 원양 실습하면서 내가 선택한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대충 맛봤기 때문이다.

그해 벚꽃 봉오리가 움틀 무렵이었다. 일 년 동안 쓸 짐을 싸 집을 나섰다. 어머니의 눈망울은 새끼를 떠나보내는 암소 같았다. 나는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먼 곳만 바라보다, 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처음 탔던 오션 뷰티 호는 20년이 넘는 노후선이었다. 주로 미국에서 곡물을 실어 왔다. 인천항에서 화장실이 딸린 작은 방을 배정받으면서 3년 넘는 승선 생활은 시작됐다.

첫 직책은 삼 기사였다. 아침,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 총 8시간 당직을 섰다. 아침잠이 많을 때인 데다가 배의 진동과 소음 때문에 설자서 항상 피곤했다. 오전 일을 하려면 대충이라도 챙겨 먹어야 했다. 출근 시간은 5분쯤 걸렸다. 기관실 문을 열면 숨부터 막혔다. 엔진의 배기열로 온도는 40도에 달했고, 기계가 내는 소음에 고막은 터질 듯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한 시간쯤 지나면 작업복은 어느새 기름과 땀으로 축축해졌다. 일은 매일 시계추처럼 반복됐다.

미국까지 가는 데는 17일쯤 걸렸다. 겨울 북극해를 항해하다 보면 방은 난장판이 됐다. 높은 파도에 배가 좌우로 25도씩 흔들렸다. 처음에는 정리도 해 보지만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예전에 엔진이 꺼지자 선장이 기관장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이야기가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잠들기 전에는 달력에 빨간 엑스 표를 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배를 타면서 내 실력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어려서부터 기계치였는데, 너무 안이하게 전공을 선택했다. 쉬는 시간에도 내려가 이 기사에게 기술을 배우고 책으로 공부했지만 기술은 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이 매일 반복됐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커졌다. 한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같이 당직서는 부하 직원과 밤새 술을 마셨는데, 일어나 보니 오후 4시였다. 제발 꿈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이었다. 일도 못하는 데다 사고까지 친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일에 흥미를 잃자 통장에 쌓여 가는 돈이 내 젊음을 판 대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군대 가는 것을 대신하는 특례 기간이 끝나자마자 사표를 썼다. 천 개 넘는 가위표를 그으며 다짐했으니 미련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육상에서 직업을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 스트레스를 먹는 거로 풀었다. 살이 10킬로그램 넘게 쪘다. 아버지와 친척 보기가 창피했다. 이렇게 대충 살면 안 되겠다고 고민할 무렵 나를 받아준 것은 다시 바다였다. 막연히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공부하다가 기관 전공 공무원 채용 공고를 보게 됐다. 짧게 준비했지만, 배에서 책을 봤던 게 도움이 되었던지 수월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하는 일은 재난 관리 업무여서 비상도 많고 일도 힘든 편이다. 다른 공무원 직종에 비해 이직률도 높다. 가끔 일이 힘들면 배 타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면 잡념이 눈 녹듯 사라진다. 길게는 반 년 넘게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던 그때에 비하면 주말부부로 지내는 것도 고마울 뿐이다. 무엇보다 해양 환경을 지킨다는 보람을 느낄뿐더러 동료들로부터 능력과 성실성도 조금은 인정받는다. 진급도 조금은 빠른 편이고 올해는 적극 행정 공무원으로도 선정됐다. 지금의 나를 키운 건 팔 할 이상이 바다였다. 거기서 흘렸던 땀과 온몸에 묻었던 기름, 미래를 향한 번뇌는 나를 성장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며칠 전 모 장관의 남편이 요트를 사려고 미국에 갔다는 뉴스를 봤다. 논란은 있지만 나는 그가 부럽기만 했다. 나도 가끔은 빠져들고 싶을 만큼 잔잔했던 적도의 핏빛 바다와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 빛나던 은하수,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던 별똥별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나는 아내가 말리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라 다시 먼 바다에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40대가 넘어서면서 잃어버린 그 꿈을 다시 꾼다면 청춘 시절 내가 있던 그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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