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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Sep 05. 2020

"참회합니다" 효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보다 낫다

신랑을 처음 만난 곳은 학교였다. 첫 발령지에서 나는 책임감 강하고 과묵해 보이는 이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건 아니고, 마음이 끌렸다. 만난 지 한 달 반 만에 사귀기 시작했다. 첫 연애였던 나는 누군가와 비교할 새도 없이 이 남자와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신혼 초 시댁 식구와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는 멘붕에 빠졌다. 시댁 식구들의 대화는 딱딱한 명령조의 말투가 총알처럼 오가는 전투 같았다.

‘지금 싸우자는 건가?’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쥘 정도였는데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친정 식구들은 정반대의 말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친정 식구들은 조근조근 이야기하며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시댁 식구들이 이런 말투를 사용하고 있다면 신랑도 100% 아니겠는가? 결혼하고 그가 나에게 자주 했던 총알 같은 말은 “똥멍청이”다. 그는 내가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실수를 하면 그 말을 했다. 웃으면서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웃으면서 했다고 해도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살면서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의 본모습 중 일부를 보게 된 것이다. 그 말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오기가 생겨 그에게 일부러 똑같은 말을 사용했다.


 똥멍청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그는 그런 말을 해본 적은 있어도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충격받은 얼굴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나와 같이 그 말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그는 서서히 그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고쳐진 것은 아니다. 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사용하여 신랑 입에서 “똥멍청이”를 물리쳤다.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면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일단 내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와야 했고, 그로 인해 그가 상처 받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나쁜 습관은 고쳐졌지만 그 방법이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법륜 스님의 책을 읽다 보면 불교 용어 중 “참회”라는 말이 나온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반성함’이라는 뜻이었다. 

요즘은 신랑이 나를 원망하거나 나무랄 때 나는 두 손을 합장하고 이렇게 말한다.


참회합니다.


그러면 그는 거기에서 멈추고 더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그는 책망의 말을 멈추었다.

사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을 때조차 ‘당신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도 내 잘못이다’라는 의미로 그에게 말한다. 


참회합니다.


그럼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먼저 가라앉고 그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중요한 것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 그것이 말에서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법륜 스님이 글을 참 잘 쓰신다. 그리고 나는 곧잘 책에 나오는 내용에 동화된다. (귀가 얇다) 그리고 결과가 좋으니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말이다. 신랑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남편 때문에 속상하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참회합니다”를 알려주었다. 친구는 말했다.


00아, 그건 불교 용어잖아. 난 기독교니까 “회개합니다”라고 할게. 근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뭐든 좋다. 참회든 회개든 남을 탓하지 않고 내 탓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지 않는다.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그 상황을 물 흐르듯 흘려보낼 수 있다. 그 말을 한 내 마음이 그 말을 들은 그의 마음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앞으로도 꾸준히 참회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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