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산책 Sep 15. 2020

신랑이 장남입니다만

벌초 다녀왔습니다

신랑을 따라 벌초하러 왔다. 사실 나는 하는 일이 없고, 그이만 한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가는 길에 말동무와 중간에 새참을 챙겨주는 일뿐이다.

하늘이 맑다. 드라이브를 가는 지금의 내 마음은 가볍지만 예초기를 들고 많은 풀과 씨름하는 신랑의 모습을 본 순간 무거워질 것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시댁에 예속되어 온갖 의무를 부여받는 며느리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장남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의무를 보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저 먼저 태어난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책임이 씌워지는 것을 봐 왔다. 그리고 장남에게 시집왔다는 이유로 함께 짊어져야 한다고 강요받는 여자들도. 예전에 비하면 세상 참 좋아지고 있기는 하다만 얄미운 건 장남과 그의 부인을 보는 형제들의 시선 인지도 모른다. 


형이 장남이잖아. 형님이 큰 며느리잖아요


그게 무슨 감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어머니는 집 안에 돈이 들어갈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생활비를 드리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당시 우리는 빚이 많았다. 애초에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대출을 받아 시작했고, 신랑이 또 대출을 받아 투자한 일이 잘못되어 인생사는 맛이 없었을 때였다. 그러니 어머니가 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속이 타들어 갔다. 어느 날은 시댁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속상한 마음에 차에서 눈물을 흘렸다. 신랑은 그런 모습을 보고 혼자 어머니를 찾아가 우리의 경제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 후로는 돈 얘기를 하지 않으신다.


그가 장남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돈을 바라신 거라는 것을 안다. 힘들게 장남을 대학까지 보냈으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인지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부당한 요구로 느껴졌다. 나를 대학에 보내주신 건 아니니까.

나도 헷갈리기는 하다. 어머니 덕분에 신랑을 만났으니 ‘어머니 덕인가?’하고 말이다. 신랑을 만난 것이 나에게 덕인지 아닌지는 노코멘트하겠다.


신랑은 어려운 일을 나누어지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어울려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남동생을 부르거나 사촌 동생들을 불러서 함께 하는 것보다 몸은 힘들더라도 혼자 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지만 몸에 주어지는 노동의 강도가 세다.  

    

등산길도 없는 돌산인 선산은 경제적 가치는 없이 오직 관리의 의무만 있다. 오는 길에 우스갯소리로 신랑이 말했다.

- 사촌들이 선산을 탐내지 않네.

- 그래? 누가 탐내면 줘. 의무랑 같이. 여보, 나는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그가 웃으며 말한다.

- 그래도 아버지 묘는 내가 벌초해야지.

고조할머니부터 시아버지까지 계신 산소의 벌초가 그에게도 무거운 것이다. 그는 땀에 흠뻑 젖어 내가 있는 차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와서 나머지 부분을 해야 한다. 그러면 친척이나 가족들은 벌초가 되어있는 산소로 와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그리움만 표현하고 가면 될 터. 그들에게는 벌초가 되어있는 산소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책임감 강한 그가 본인의 일이라 생각하여 언제나 불평 없이 이 일을 하지만 그가 만약 게으른 사람이었다면 누군가가 그 짐을 떠맡아야 했을 텐데 아무도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는 성실하여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믿음을 주는 존재니까.     


하지만 그도 아들에게만큼은 이 일을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묘를 만들 수 없는 상태(산소 앞에 집이 생겼다.)이기도 하니 화장 후 분봉을 없애고 벌초하기 쉽게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나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는다. 그는 평소에 나에게서 대접받는 걸 좋아하지만 힘쓰는 일에는 나를 배제한다. 입과 마음으로만 걱정하는 나는 차에 앉아 그를 보며 글을 쓰고 있다.


그는 나에게 당부의 말을 하며 벌초를 하러 갔다.

멧돼지가 오면 경적을 울려.


겨울에 칡을 캐러 왔을 때 멧돼지 한 마리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는 신기해하고 그는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비록 새끼였지만 근처에는 어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뱀, 말벌, 예초기에 맞고 튀는 돌 등 벌초를 할 때 위험한 일들이 많다. 그는 주의를 기울이며 올라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200평 정도 되는 산소의 풀들을 제거하고 있다. 무거운 예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 어깨를 보면 멍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거 뭐 일 년에 몇 번이나 한다고 생색이냐고. 그럼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거 뭐 일 년에 몇 번 하지도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좀 하라고. 나눠지면 얼마나 가볍겠냐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함께 하자고 말하는 것보다 의무가 없는 사람이 나눠지자고 말하는 게 훨씬 쉬운 거 아니냐고. 아니면 벌초가 되어있는 산소를 당연하다 생각 말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어찌 되었든 권한은 없고 의무만 있는 장남이라는 위치가 보기에 불편할 때가 있다.


* 커버 이미지 출처: pikist

작가의 이전글 제때에 풀어주지 않으면 단단하게 꼬이게 마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