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로 인생을 배웁니다
5월 말에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의 종류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호박고구마, 꿀청 고구마, 밤고구마. 당연히 신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박고구마로 2단을 심었다. 1단은 대략 100개의 줄기로 묶여 있으니 200개의 호박고구마 줄기를 심은 셈이다.
오전에 고구마를 심고, 오후에 부부동반 모임에 갔다. 고구마를 심다 늦게 도착했다는 말 끝에 친구가 말했다.
- 난 밤고구마가 좋더라.
평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친구를 보며 “그 친구는 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을 하던 신랑이 주말에 시장에 나가 밤고구마 3단을 사 가지고 왔다.
밤고구마라니. 우린 한 번도 밤고구마를 사 먹어 본 적도 없잖아.
순간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고구마 줄기를 심으러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혼자 나간 신랑은 2-3시간 허리도 펴지 못하고 고구마 줄기를 심었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됐을 텐데 난 화가 나서 신랑과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표현하기 구차하지만 질투라고 해두자. 우리는 3일간 어색하게 지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나도 내 맘을 알 수가 없었다.
신랑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걸 타이밍을 잡고 있었고, 나는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니, 다스려지지 않았다.)
- 이제 다 풀린 거야?
- 뭐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근데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예를 들어볼게. 여보는 매운 청양고추를 안 먹잖아. 그래서 우리는 오이 고추만 심지. 그런데 00 씨가 “전 청양고추를 정말 좋아해요.”라고 말했다고 쳐. 그리고 내가 주말에 혼자 시장에 나가 청양고추 모종 30개를 사 와서 당신한테 같이 심자고 말한다고 생각해봐. 기분이 어떨 거 같아? 근데 말하다 보니까 화가 나네.
신랑의 대답은 들어보지도 않고 방에서 나왔다. 예를 들다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이고, 나의 에고여!
우여곡절(나의 침묵이 그를 얼마나 힘들게 했겠는가?) 끝에 우린 화해했다. 그 후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나는 잘 나가는 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신랑에게는 한낱 작물의 종류 중 하나인 밤고구마가 나에게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불씨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이러니 마음공부가 필요한 거지.)
우리에게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그것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꺼내 놓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길 좋아하는 신랑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호박고구마가 좋아요? 밤고구마가 좋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호박고구마가 맛있지.”라고 대답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호박고구마 선호도’ 때문에 그는 지인들에게 우리의 ‘고구마 사건’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의 금기어는 ‘고구마’였다. 고구마 수확 시기가 되면 편안하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밤고구마도 먹어보니 맛있네.
드디어 고구마 수확 시기가 되었다. 먼저 심은 호박고구마를 수확한다. 그런데 색깔이 이상하다. 호박고구마 껍질은 황톳빛이 나야 하는데 이것은 붉은빛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중에 심은 밤고구마도 몇 개 캐내어 본다. 이것도 붉은빛이다.
집으로 가져가 에어프라이어에 구웠다.
이럴 수가! 호박고구마라고 심은 것은 밤고구마요,
밤고구마라고 심은 것은 꿀청 고구마로다.
결국 호박고구마는 구경도 못 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신랑과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고구마를 통해 새옹지마를 배우네.
(새옹지마: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
이게 뭐라고 나는 여보를 힘들게 했을까?
"참회합니다."
그래도 내 입맛에는 꿀청 고구마가 밤고구마보다 맛있다. 뒤끝 인지도 모른다.
커버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