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깔은 좋은 공포멜로
사실 전작 <퍼시픽 림>에서부터 마음 놓았다. 어쩌면 코지마와 합작하려는 “사일런트 힐”이 좋은 복귀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일런트 힐”이 엎어지고 <프로메테우스>로 준비하던 <광기의 산맥>이 엎어지면서 어쩌면 델 토로의 계획은 완전히 꼬였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델 토로는 팀 버튼과 비슷한 부류의 감독이다. 디자인만으로도 주목받는 감독. 팀 버튼은 지난 전시회로, 델 토로는 디자인 저서로 자신들의 팬덤이 두터움을 증명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커리어마저도 비슷해진다. 시대가 지날수록 명작이 되는 몇 작품을 뒤로 하고 서서히 수작은커녕 평작을 찍어내고 있으니까.
<크림슨 피크>는 기존의 델 토로의 장점과 단점이 정말 극대화된 작품이다. 영상적인 면에서는 흠잡을 게 없을 정도다. 으스스한 유령의 집 분위기를 형상화한 저택 디자인이나 종종 등장하는 유령의 디자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특히 폐허와 저택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표현한 알러데일 홀은 “호그와트” 이상으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크림슨 피크>가 전적으로 실패한 건 부족한 서브텍스트이다. 끊임없이 이디스가 말하는 “유령은 과거, 상징”이란 것이 정작 이 작품에는 묻어나지 않는다. “과거”인 것은 맞으나 그것을 “상징”으로 승화하지 못한다. 보다 분명하게 이중적인 스토리를 지녔던 감독의 작품 <판의 미로>와 놓고 본다면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층적인 의미를 포용하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지나친 복선이 전개를 예측하게 만들고 그 결과 힘빠지는 인물의 퇴장만이 남는다. 작품의 분위기와 엔딩으로 봤을 때 분명 여운이 남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남매의 비극적인 운명과 달리 상투적인 성격묘사는 그런 여운을 느끼는 걸 죄책감 들게 한다.
그럼에도 대단한 건 배우들이다. 특히 주인공 삼인방은 각자 맞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한다. 톰 히들스턴은 매력적인 토마스 샤프를 보여준다. 원래 이 역할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였다고 하는데, 이 대본 그대로 그가 연기했다면 글쎄, 분명 아쉬웠을 가능성도 있었을 거라 생각할 정도다. 미아 바시코프스카 역시 이디스라는 섬세한, 그리고 예민한 역할을 잘 보여주어 관객에게 공포감을 전달한다. 그러나 역시 제시카 차스테인이 가장 빛나는데, 공감하기 힘든 인물을 공감하게끔 할 정도로 감정을 정확히 전달한 클라이막스의 연기가 일품이다.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는 것 같은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제작까지 겸하면서 돌아온 영화가 다소 미적지근한 작품이라는 건 팬으로서 아쉬움이 크다. 자신이 남긴 <판의 미로>라는 명작을 언제쯤 다시 뛰어넘을 수 있을지 이제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