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는 메타포가 메타포를 뭉개는 아이러니
꽤 신중하지 않았을까. 감독이자 각본가의 입장에서 이 작품은. 그런 만큼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이 영화엔 역사의 의식과 그를 위한 메타포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구든 들어봤을 법한 일제시대의 얘기와 신민 의식. 그것이 이 영화 곳곳에 투영돼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친다. 그저 '기대치에 못 미친다'가 아닌 '아예 기대와 다른' 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이자 단점이다. 왜 이해영 감독은 그런 비틀기를 시도했을까. 도대체 무엇때문이었을까.
직설적으로 말해 이 영화가 남들의 기대처럼 흘러 갔다면 최소한 평균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해영 감독의 빼어난 미장센(이는 촬영감독 덕일지도 모른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오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권력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로도 예쁜 여학생 무리, 거기에 박보영과 박소담이라는 방점. 실제로 중반까지는 이 영화가 그럴싸하면서도 예쁜 영화로 된다.
아마 이해영 감독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후반부 전개에 담겨있을 것이다. 뭉개진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이 잊고 있는 그것. 그걸 SF적 상상력과 결합했을 때, 혹은 소녀적 감성과 결탁했을 때 다시 한 번 상기할 만한 여운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포용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완전히 비뚤어져버린다. 은유적 방식을 통해 전달되던 스토리에 역사적 사실과 극적인 상상력이 접목됐을 때 그것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게 특이한 냄새를 풍긴다. 결국 역사가 역사를 집어먹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경성학교>가 보여주는 것이다.
공포영화에 소녀적 감성이란 점에서 유사한 <장화, 홍련>을 생각해보자. 이름에서부터 설화를 따온 이 영화는 정반대로 지금에 있을 법한 심리를 그려내며 마지막까지 있을 법한 얘기로 둔갑시킨다. 그것이 이 영화가 남기는 여운이다. 공포라는 것이 단순히 귀신이나 살인마 등 이질적 존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성학교>는 그 점에서 공포영화로서도, 팩션물로서도 실패한다. 여기서 공포는 결국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귀결되고 역사는 송두리째 파괴된다. 만일 <경성학교>가 아예 팩션으로 달렸다면 의외로 시원한 쾌감을 안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적 아픔을 은유로 승화하려 했고, 그것은 우리가 아는 역사보다 도리어 약했기에 이질감을 자아내고 만다.
<경성학교>는 그래서 더욱 아쉽다. 좋은 의도가 살아날 수 없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예쁜 여배우들과 아름다운 미술과 연출로도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영화는 역시 만들어져봐야 알 수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