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아닌 내일의 자신에게 선물해도 좋을 작품
영화만이 아니라 예술계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느껴봤을 기분일 것이다. ‘이거는 나중에 봐도 죽이겠다’ <아노말리사>는 그런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마이클이 대략 40대 이상의 권태기, 외로움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공감하기엔 다소 거리감이 있어서이다.
또한 마이클이 겪는 증세, 극도의 고독함이나 지루함은 전세계에 공통의 문제라 치더라도 그것을 해결해나가려는 방향은 다소 미국적인 틀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만일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아노말리사>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면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볼만도 하다. 이런 이유로 <아노말리사>는 지금보다 나중을 위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런 평가가 전혀 이 작품을 격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정서는 감흥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중’을 고려할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아노말리사>는 누구나 겪어봤을 ‘혼자’라는 실재의 체감과 영원히 계속될 수 없는 사랑을 담아낸다. 그렇기에 마이클의 내면 정서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가 있다.
감탄할 만한 부분은 물론 스톱모션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이다. 스톱모션이라고 해도 방식은 다양하다.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처럼 유화 느낌을 낼 수도, <유령신부>처럼 매끈한 석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아노말리사>는 정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준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이론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듯 사람의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하지만 신체 비율이라던가 피부에 가면 같은 질감을 가해 영화의 주제에도 힘을 실어준다. 영화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도 실사영화로 찍기 힘든 내용이었기에 이 스톱모션 기법을적당한 방법이자 작풍을 살리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야 원체 사람을 끌어당기는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지만 <아노말리사>에서는 조금 애매한 느낌도 있다. 스톱 모션 기법이 아니었다면, 표현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아마 영영 스크린으로 접하지 못했을 느낌도 있지만 그건 그의 이야기가 완성도 있다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선을 형상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노말리사>는 스크린으로 옮겨질 수 있었지만 그 독특함에 비해 카우프만의 이야기 전개는 그의 전작들의 흔적이 조금 묻어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애니메이션이다보니 영화적 감각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넘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이 영화를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존재한다. ‘마스터피스’에 오를 것이 명백해보이는 이 작품을 보다 큰 스크린에서 많은 관객들이 접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