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니 감독은 음악을 안다
<싱 스트리트>가 '로튼 토마토'에서 100%를 받을 때부터 줄곧 개봉만 기다려왔다. <원스> <비긴 어게인>을 좋게 본 관객으로 저 놀라운 점수에 감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개봉날 달려간 극장에서 <싱 스트리트>는 소박하지만 웅장한 성장기를 그려내며 빛나고 있었다.
존 카니 감독의 작품을 접할 때 놀랐던 건 '음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다는 점이다. 장르라든가, 가사, 리듬 같은 구체적인 요소가 아니라 음악이란 예술이 가진 정서적인 작용을 그는 꿰뚫고 있다. 그래서 <원스>와 <비긴 어게인>은 전혀 다른 음악영화이고, <싱 스트리트> 역시 두 작품과 다른 음악영화이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비교하자면 <원스>는 독백, 감정적 해소로서의 음악을 담는다. <비긴 어게인>은 대화이자 공감의 순간을 담는다. <싱 스트리트>는 선언, 외침이자 성장 그 자체를 음악으로 그려낸다. 배경과 시대가 다르니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존 카니 감독의 이 세 작품에서는 이 음악의 각 요소가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감싸안고 있다. 그래서 음악도 음악대로, 영화도 영화대로 다른 색채를 띤다.
간단히 말해 <싱 스트리트>는 미학적으로 눈에 확 들어온다던지, 엄청나게 참신하다던지 그런 류의 작품은 아니다. 냉정하게 보면 말하고 싶은 것을 위해 인위적으로 짜여진 느낌이 더 강하다. 막 태어난 밴드의 곡들이 모두 빼어난 퀄리티를 보이지만 <싱 스트리트>는 그 성장과정을 서술하지 않는다. '원래 이정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이란 설정을 넌지시 던져주고는 그대로 표현한다. 이토록 허술한 전개를 태연하게 털어놓기에 <싱 스트리트>는 보다 뻔뻔한 매력이 넘친다.
그리고 이 전개의 구멍을 음악이 채워준다. 10대 때 그 내면에서 터져나오는 각종 이야기를 각기 다른 색으로 담은 음악들이 관객들이 다음 장면으로 전진할 수 있게 이끌어준다. 주인공 코너는 그 표현들로 계속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다. 구차한 설명없이 겉모습만 봐도 개성 넘치는 조연들이 코너의 곁에서 유머를 가미하기도 하고, <싱 스트리트> 속 세계를 더욱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그 '뻔뻔한 태도'가 <싱 스트리트>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향해가는 목표가 확고하기에 엄청나게 섬세한 묘사없이도 어느 순간 관객들은 코너의 성장기에 빠져들게 되고, 이 영화가 말하는 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영화 속 코너의 형 브렌든이다. 브렌든은 이 영화에서 지대한 존재감을 발한다. 그가 없더라면 <싱 스트리트>의 성장기는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브렌든은 그저 '골방철학자'일 뿐이다. 매순간 코너에게 조언을 주고, 음악적 소양도 적잖은 그를 보면 문득 <원스>의 남자가 떠오르기도 하고 또 영화의 진정한 메시지를 되짚어보게도 된다.
하지만 <싱 스트리트>의 문제는 후반부에 가면서 객관화되지 못했다는 부분이다. 보는 이마다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싱 스트리트>의 엔딩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영화 전반적인 톤을 뭉개는 느낌을 준다. 물론 이 영화의 주된 표현방식이 동화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엔딩만큼은 그 느낌이 과해 선로에서 엇나간 인상을 준다. 특히 마지막 졸업파티 때 곡들이 몇 번이나 클라이막스처럼 느껴질 만큼 좋았기에 그 지점을 지나 더 갈 필요가 있었을까, 반추하게 된다.
그럼에도 <싱 스트리트>는 좋은 영화다. 전작들에 이어 감히 추천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소년의 감성과 성인의 감성이 적절히 배합돼있다. '행복한 슬픔'이란 라피나의 언어처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순간들이 함께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음악은 정말 좋다. 1985년의 음악이 어떤지 몰라도, 최소한 영화 속 수록된 음악들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세련되다. 많은 관객들이 <싱 스트리트>로 음악과 영화의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