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고 속아줄 수 있는 허망한 꿈
영화는 닫혔는가, 열렸는가. 관객 개개인의 ‘영화’라는 정의가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에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문제를 영화 <곡성>은 자신만의 해법으로 풀어냈다. 닫혀있는 것을 조합해 열린 것을 만든다, 그것이 <곡성>만의 대답이었다.
상업영화지만 그 지향점은 마치 신비주의로 향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는 그럼에도 굉장히 빼어난 미장센을 선사한다. 기존 나홍진의 두 편과도 다르고 최근 한국영화가 지향하는 작품의 전반적인 형상과 전혀 다른 <곡성>은 고전적인 영상미를 담고 있다. 최근 상업영화가 빠른 편집, 인물에 꽉 차는 프레임을 만든다면 <곡성>은 정반대로 멀찍이 떨어진, 그리고 인물보다 그 주변 층(레이어)를 영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고 그 테크닉이 떨어지느냐, 그건 또 아니다. <곡성>은 상영시간 내내 집요할 정도 섬세한 트래킹 쇼트들로 관객들이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마치 동굴로 들어가는 발걸음처럼 무겁지만 분명하게 카메라는 그 세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카메라워크 전에 프레임 내에 층을 만들어 깊이를 부여한다. 트래킹과 레이어의 만남은 지독하게 관객의 눈을 홀린다.
그것 뿐인가. 마지막까지 보게 되면 이 영화에 숨겨진 해답은 편집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장면들이 다시 해체되어 알맞은 자리에 들어갈 때, 관객은 ‘속았다’라는 쾌감을 얻게 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굿 장면이다.
이렇게 고전적인 미장센과 현대적인 기술을 적합하게 배합한 <곡성>은 사실 영화 내적인 전개도 의외로 닫힌 구성을 가지고 있다. 다소 혼란스런 내용은 영화 막바지에 거의 정리되는 셈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이루는 요소 자체가 종교와 부조리에 기반을 두고 있어 마치 열린 것 같은 착각을 줄 뿐이다.
신기한 건 이 두 가지 닫힌 요소, 내적인 구성과 외적인 형태가 합쳐지면서 끝없이 확장되는 영화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동양적인 주술과 서양적인 종교론의 결합은 물론이고 한국의 역사적인 흐름, 공권력과 사적인 삶의 충돌 등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곡성>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이 모든 것을 떠나 그저 ‘아버지’의 투쟁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추격자>나 <황해>에서 주인공들이 무척 강인한 존재였음을 떠올린다면 이건 ‘존재의 투쟁’가 아닌 ‘투쟁의 존재’를 담고 있다고 접근할 수도 있다.
영화 내내 그려지는 관계의 역전과 미심쩍음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징, 유머러스함에서 비극으로 치닫는 방향성까지 <곡성>은 기대 이상으로 삶과 생의 부조리를 치밀하게 담아낸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문장(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같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을 이토록 잘 구현해낸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특히) 드문 편이다.
나홍진 감독이 오랜만에 돌아온 만큼 이 작품에는 그가 고민했을 그 삶의 무게가 섞여있다. 때로는 유쾌하게, 그러나 그 저변에는 이미 뼈 아픈 고통이 가해지는 <곡성>처럼 관객들의 삶은 알 수 없는 순간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나홍진 감독은 그를 '불가항력'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렇게 될 뿐이라고.
그래서 <곡성>은 많은 이들에게 흥미와 함께 논쟁을 불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면을 차치하더라도 그 내용과 태도는 분명 허망함을 내포하고 있기에. 애초에 허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그럴싸해보이게끔 풀어내고 있기에.
하지만 그리스식 운명론적 비극을 새롭게 한국에 풀어낸, 그것도 (자신들이 지향한 영상 구조처럼) 수많은 레이어를 쌓아둔 이 이야기를 미워할 수는 없다. 얄팍한 속임수라도 때로는 속아주는 것이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 <곡성>이라면 두고두고 속아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