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만이 할 수 있었으면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칸트, 기타 거론되는 철학들. 그것들이 어떤 살인 사건과 연관돼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대학 교수와 여학생의 로맨스에서 비롯된 거라면. 이렇게 봤을 때는 실로 묵직한 느낌을 주지만 '우디 앨런'이란 명칭이 붙는 순간, 전혀 다른 영화가 그려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디 앨런은 그렇게 만들었다. 어떤 담론이 형성되기보다 유머와 역설을 택하는 그의 작품들처럼 이 영화 역시 그렇다. 그리고 <이레셔널 맨>의 한계는 그래서 더 아쉽다.
이 영화는 일단 재밌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어렵지도 않고 꼬아놓지도 않았다.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문학적인 내레이션과 끊임없는 대화들은 일순간 찾아오는 사색의 순간을 포착하게 도와주고, 그 자체로도 인물의 성격을 전달하는 것에 제역할을 한다.
생기를 잃은 남자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행위로 삶의 의미를 찾는 건 그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그걸 덧댄 어떤 이야기를 거둬내고 본질적인 중심인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래서 <이레셔널 맨>은 담백하고 거기서 시작되는 즐거움이 있다.
그래도 한줄 요약을 해야한다면 '호아킨 피닉스의 변신쑈'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다. 엠마 스톤과 호아킨 피닉스는 시종일관 재잘거리면서도 유쾌한 호흡을 보여주고 그 중 호아킨 피닉스는 염세주의자부터 결과론자까지 변해가는 모습을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이레셔널 맨>의 재미를 결국 이 남자와 여자의 변화라고 봤을 때, 호아킨 피닉스의 작용과 엠마 스톤의 반작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최고다.
반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의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샴페인을 땄는데 그저 '푸슉'하고 김이 빠지는 모양새다. 이 안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위해 인용된 작품을 정확히 이해해야 했던 걸까, 고민했지만 그렇다면 그것 역시 역설일 뿐이기에 그저 결말을 내세울게 없었구나 싶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이레셔널 맨>은 볼만한 영화이다. 재치도 있고 생각해볼 만한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감각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디 앨런'이란 이름을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까지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