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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thaul Aug 22. 2016

서울역

대한민국 사회 속 ‘여성’의 처절함

결단코 <서울역>은 좀비 영화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사회 비판 영화겠지’라고 이해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 연상호 감독의 영화니까. 그렇지만 <서울역>은 사회 비판 영화도 아니다. 단언컨대 연상호 감독이 이 작품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대한민국 여성’의 삶이다.     

 

 모든 작품은 해석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연출자는 그 해석의 방향성을 넌지시 제시하는 편이고 그렇기에 웬만한 작품은 그 주제에 맞게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서울역>은 보기보다 훨씬 깊은 곳에 주제를 숨겨두고 있다. 보여줄 뿐, 설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해결의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한, 오랫동안 축적된 한국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울역>을 본 사람 중 일부가 지적하는 문제는 주인공인 혜선(심은경)이 굉장히 수동적이란 점이다. 그는 영화의 중심이면서도 대개의 고비를 다른 남성을 통해 해결한다. 때문에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그렇듯 ‘수동적’이고 ‘타자화’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 ‘왜?’라는 고민을 해보면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지금껏 ‘남성의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혜선은 이 영화에서 누군가를 따라가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상대는 전부 남성이다. 남성에게 지시를 받거나 그들을 따라하거나 혹은 도움을 받아야만 삶을 살 수 있는. 이것이 바로 (남성성이 지극히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살 수 있는 방법임을 <서울역>은 끊임없이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혜선은 능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성적인 시선에서 훨씬 ‘여성’다워야만 했다. 혜선이 가출소녀에 매춘부 출신으로 그려지는 건 단순히 사회의 저열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성’을 내밀어 남성들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살 수 없는 대한민국 여성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혜선은 짧은 치마에 노골적으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다. 누가 봐도 ‘여성스런’ 인물 디자인을 취한 건 이 영화의 주제가 거기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또한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성들은 살기 위해 모방하거나(혜선) 정당한 요구에도 굽신거리듯 부탁해야 하거나(봉사자) 미치거나(지하철 여자) 같은 모습이다. 물론 자생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가게 주인들도 있으나 보란 듯이 감염자로 재등장한다. 마치 그런 삶이 이 문제의 이상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처럼.     


 혜선이 노숙자에게 권총을 내어주는 것이나 쉽게 그를 따라나서는 것도 이미 그런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의심이나 고민할 새도 없이 그것이 정말 당연하게 내면화돼있는 것, 그게 <서울역>이 생각하는 ‘남성 사회가 강조한 여성이 가져야 할 덕목’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울역>은 대한민국 사회가 제시하는 유일한 희망을 허상이라고 지적하기에 이른다. 바로 ‘아버지’란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보호자이자 책임자로 표상되는 '아버지'가 마침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이 사회가 여성에게 줄 수 있는 구원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지시 제시한다.     


 심지어 한 술 더 떠 남성은 여성을 유린하려고나 하고, 금전적인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등 ‘아버지’로 상징되는 근대적인 남성성은 최악의 단면을 보이고 만다. 구원은커녕 상대를 착취하려는 모습이다.     


 <서울역>은 그래서 마지막에 여성이 남성에게 복수하는 장면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의로 해냈다기보다 남성적인 사회가 낳은 ‘괴물’의 힘을 빌려서 해낸다. 날은 밝아오지만 이미 모든 환상은 깨졌고 악몽은 계속된다. 그게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이라고, <서울역>은 결말을 내린다.     


 <서울역>은 좀비영화라고 한정짓고 보는 순간 절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클리셰도 많고 긴장감이나 박진감이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프레임을 해체한다면 <서울역>이 왜 <부산행>의 ‘짝패’인지, 그리고 진짜로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부산행>과 <서울역>은 시퀄과 프리퀄이 아니다. 그렇다고 희망적/절망적인 감성만으로도 연결된 건 아니다. 이 두 편이 짝패인건 한 쪽은 남성성의 낙관적 결과를 믿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비관적 현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모처에서 <서울역>을 ‘우화’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모두가 생각하듯) ‘사회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여성 영화’였기 때문에 우화라고 지적한 것이다.      


 시선을 돌리는 순간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입체적인 영화 <서울역>은 그럼에도 혹평일색일 수밖에 없다. ‘역겹다’ ‘불편하다’라는 말을 들을, 들어야만 하는 주제를 짚어냈고 있으니까. 연상호 감독은 이런 한국 사회의 여성들을 연민하고 있는 듯하다. 해결책을 주지 않지만(사실 줄 수 없는 것에 가깝겠지만) 적어도 그 삶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역>은 명백하게 한국 사회의 컨템포러리를 정확하게 담고 있다. 현재 여혐/남혐의 문제, 여성들의 자주적인 삶 등의 문제가 표면화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언젠가 이 작품이 텍스트로든, 컨텍스트로든 재평가 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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