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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에 자신의 세 남자를 만난 여자의 이야기. '최악의 하루'는 언뜻 보이기에 그저 '로맨틱 코미디'의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포스터 등 외부에 노출되는 내용 또한 굉장히 위트 있는 멜로물을 표방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악의 하루'는 그렇게 평면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김종관 감독의 창작과 삶에 대한 시선, 그리고 그의 주특기인 멜로 감각 등 여러 가지가 버무려진 결과물인 셈이다.
먼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축은 은희(한예리)만이 아니다. 예고편에서는 그렇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를 받치고 있는 건 우헤타 료헤이(이와세 료)이다. 현오(권율)와 운철(이희준)이 은희의 삶을 맴도는 인물이라면 료헤이는 그런 은희의 삶을 그린 이 영화의 참된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건 그가 이 영화에서 '작가'라는 무척 상징적인 직업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그렇게 쉽지 않은 영화인 건 전체적인 구성이 스스로 다층적인 텍스트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료헤이)와 작품의 인물을 재현하는 배우(은희)의 만남은 물론이고 작품의 담화, 시선들은 이 영화가 단순한 연애물이 아님을 암시한다. 거기에 영화 곳곳에 그런 대화들을 배치해 은희의 하루가 어느새 작품을 향한 은유로서도 작동하게 된다. 이런 지점은 결말까지 이어지면서 멜로로서도, 작품으로서도 진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최악의 하루'는 하루의 흐름, 즉 시간이란 부분에서도 섬세한 시선을 두고 있다. 일단 세 남자, 운철과 현오와 료헤이가 이미 과거-현재-미래의 시간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들을 만나게 되는 과정의 은희(와 료헤이)는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돌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카메라는 동일한 앵글에 변화하는 시간을 그림자로 담아낸다. 때때로는 인물들의 관계가 바뀌기도 하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뀌기도 하지만 그런 장면에서도 가장 본질적으로 담겨있는 건 결국 시간의 흐름이다.
어디 시간뿐일까.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건 상대에 따라 심리적 대응이 달라지는 모습을 좀 더 쉽게 표현하기 위함이 아닐까. 정확히 일치하지 않지만 일종의 페르소나 이론인 것처럼. 그래서 은희는 중간에 굳이 머리를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고 과거에선 웨이브 컬이 있는 머리로 등장한다. 시간과 상대, 그것들에 대한 심리가 조금씩 다르다는 걸 이 영화는 넌지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스포일러를 피해야만 하겠지만, 이런 모든 점이 귀결된 '최악의 하루'의 엔딩은 요근래 극찬했던 '우리들'의 엔딩만큼이나 매력적이고 여운이 길다. '우리들'의 엔딩이 이야기 속에서 빛났다면, '최악의 하루'의 엔딩은 스크린이란 벽에서 정확히 만나는 작품과 관객의 순간을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면들을 차치하더라도 '최악의 하루'는 매력적인 멜로이다. 한예리는 시종일관 이 영화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데 일조함은 물론이고 인물마다 그때그때 다른 성격을 꺼내들면서도 '은희'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만일 한예리가 아닌 배우였다면 과연 이런 텍스트를 담고 있다해도 '최악의 하루'가 접근성이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와세 료도 무게잡지 않으면서도 순둥이 같은 료헤이 역을 해냈으며 권율과 이희준도 인물의 성격을 착실하게 표현해 '핑퐁 싸움'을 거듭하는 영화의 재미를 살렸다.
'최악의 하루'는 이렇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곡해의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홍상수 영화의 대중적인 멜로 버전'이라고 느낄 만큼 해석의 맛과 상업영화의 재미가 잘 버무려졌다고 생각한다. 김종관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또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