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재난극의 한계
사실 재난극이란 장르 자체가 쉽지 않다. 재난극은 대체로 블록버스터라는 제작 형식 아래 존재하는 드라마의 일환으로 거기에는 때로 각각의 다른 장르들이 혼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멜로나 액션이나 어드벤처, 심지어는 미스터리조차도 가미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판도라>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만 NEW에서 시나리오 단계 만장일치 호평, 그리고 시사회 직후 '현실적인 재난'이란 평가에서 조금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극장에 걸린 <판도라>는 어느 지점에서 호평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잡했다.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 재난극이라니!' 같은 지점에서는 순위 안에 들 수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든 재난극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어설프게 판을 벌리고 수습해나가는 과정이나 '군상'을 담으려다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야기 등 전형적이다 못해 그것을 응집해놓은 느낌마저 든다.
사실 어느 문제점을 다 차치하더라도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극한의 상황에서도 과하게 건전한 인물들의 언행이다. 대통령은 국가적 위기에도 소리 한 번 지를 줄 모르고, 원자력 발전소 인물들은 그 모든 상황에서도 욕설 한 번 내뱉지 않는다. 물론 관객에 따라 욕설이 오히려 이질감을 줄 수 있다곤 하지만, 이 정도 상황에서도 입이 고운 이들을 보면 현실적인 것도 비현실적인, 마치 누군가가 낭독하는 영웅담을 듣는 듯하다.
이는 단순히 욕설을 향한 지적이 아니다. 이건 <판도라>가 스스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이 작품은 인간 사회의 비극인 듯 하지만 어느 정도는 보이지 않는 '악마'와 투쟁하는 과정이다. 그 두 시선 사이에서 <판도라>는 어떤 지점을 더 고수할지 정하지 못한 채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욱여넣었고, 그러니 결국 감동만이 남은 감정적인 상투극에서 그치고 만다.
김성수 감독의 <감기>(2013)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판도라>는 한때 인간의 가장 큰 힘인 '과학'이 재난으로 들이닥치는 순간을 담고 있다. 그 역전의 공포를 더욱 극대화시켜야 마땅함에도 <판도라>는 자꾸 정치에 눈을 돌리고 사회적인 부조리에 눈을 돌린다. 잘 생각해보면 이 작품은 어떤 외형적인 증세 없이 속출하는 증상이 가장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선사한다.
재혁(김남길)이 길섭(김대명)을 업고 나왔을 때, 그 순간 다시 사고 현장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재혁의 얼굴을 잡아서는 안됐다. 오히려 재혁의 눈에 비친 원자력 발전소의 '악마적 이미지'를 형상화해 사고로 죽어가는 이들과 대비시켜야 마땅했다. 하지만 <판도라>는 평섭(정진영)의 등 너머로나 한별 1호를 포착할 뿐, 재혁과 이를 대치시키지 않는다. 재혁이 후반부가 되기 직전까지 주인공다운 힘을 얻지 못하는 건 그전까지 그에게 이런 위치를 부여하지 않아서다.
이런 연출적인 면을 떠나서도 <판도라>는 소모된 이미지의 배우를 다시 배치시키고 같은 걸 반복케 한다. 안타깝지만 이 영화의 어떤 배우도 제대로 빛나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충무로의 다작왕' 이경영의 '그 연기'를 비롯해 정진영, 강신일, 주진모, 송영창 등 연륜 있는 배우들의 이미지 반복이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판도라>에 남는 건 원전사고라는 현실적인 재난과 그래도 감동적인 후반부 정도이다. 전술했듯 '이 정도 재난극'이란 선이라면 만족할 만하다. 미국에서도 '재난 영화' 하면 아직도 <포세이돈 어드벤쳐>(1978) <타워링>(1977)이 언급될 만한 높은 기준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계가 명확한 재난 영화라면 앞으로 좀 더 고심해서 제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