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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thaul Jan 03. 2017

아수라

치졸한 이분법은 없는 피카레스크

사실 <아수라>가 국내에서 받은 평가는 굉장히 박했다. 다섯 배우들의 이름값과 <내부자들>을 이을 '사회 고발극'이란 느낌은 <아수라>가 가진 힘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물론 <아수라>를 재밌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 단순히 재밌냐 아느냐의 관점을 넘어 보다 정통으로 '악'을 그렸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아수라>는 한국의 가상도시 안남을 배경으로 하지만, 훨씬 더 판타지적인 부분들을 강조한다. 안남의 뒷골목은 동남아를 연상케 하고, 흔히 말하는 '달동네' 역시 한국의 것을 닮지 않았다. 푸른 대문이나 기와집, 컨테이너 박스 등으로 연상되는 한국의 빈민촌과 달리 <아수라>의 빈민촌은 미로처럼 꼬인 구조나 녹슨 철강으로 대변된다. 그 과정에서 안남과 인물들은 분명 한국이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인물들의 묘사에서도 그렇다. 각각의 인물들은 가족이란 배경이 없는 사람들처럼 그려진다. 그나마 정감이 가야 하는 한도경(정우성)의 아내는 묘사가 되지만, 그는 도리어 한도경을 악의 소굴로 몰아넣은 요인 중 하나이다. 딱 한 번 외국인 아이를 제외하면 아이들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수라>는 그 제목처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수라도 안남을 그리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소거해나간다.


때문에 <아수라>는 결코 사회 고발극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는 바로 '성'의 거세이다. <내부자들>이 악역을 단번에 소개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 중 하나는 '난교파티'다. 간단하게 늙은이가 젊은이를 탐하는 단 한 장면만으로도 그들은 관객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아수라>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성적인 코드를 발견할 수 없다. 더 자극적으로 그렸어도 될 이 영화가 굳이 성적인 부분을 제한 건 폭력으로 상징되는 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악인만이 등장하는 장르 피카레스크를 차용한 <아수라>는 주인공인 한도경, 그와 비슷하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을 문선모(주지훈)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갖는 과정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극한에 달한 도경과 상황이 좋아지자 급격히 태도가 바뀐 선모를 보여줄 뿐이다. 이 방법으로 <아수라>는 폭력에 쩐 군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장점과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정 붙일 수 없다는 단점을 함께 가져온다. 


표면적으로 <아수라>는 매끈한 상업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내를 까 보면 (제작진이 무엇을 지향했는지와는 별개로) 독립영화처럼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강력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수라>의 패착은 그 지점에서 있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는 작품의 특성과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캐스팅과 시기. 그 두 가지의 불화는 <아수라>를 직시하기엔 큰 벽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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