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각형 속 인간성의 담론
파격적이다. 형식도, 내용도, 그것들이 품은 메시지까지도 <사울의 아들>은 파격적이란 말이 가장 적합하다. 관객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다가올지는 둘째 치더라도 4대 3 프레임의 활용과 비정상적인 환경을 그대로 구현한 사운드, 그리고 의도적으로 일방적인 연출법은 여타 영화에서 보기 드물다.
그동안 세계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작품들은 당연하게도 이 전쟁이 얼마나 부당했으며 피해자들이 겪은 상황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작품들은 그것을 위해 차근차근 점층적으로 감정적인 표현을 영화 속에 그려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에서 그려지는 홀로코스트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울(게자 뢰리히)은 피해자이지만 한편으론 가해자로도 보일 수 있는 노역자 '존더코만도' 소속이고, 그가 영화 내내 하는 행동들은 결국 개인의 감정에 기반한 것이다. 사울 자신도 목숨을 걸지만 그 주변 인물들까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내쳐지는 것도 여러 번이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은 '인간성의 발현'을 그린다기보다 역으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영화에 가깝다. 죽음이 매 순간 맴도는 상황에서도 미치지 않고 버텨내며 마지막 안식을 취하는 것, 아니면 대의를 위해 그 모든 걸 접는 것, <사울의 아들>은 두 가지 중 극단적으로 전자에 몰두하는 사울을 통해 되묻고 있다. 때문에 사울은 영화에서 극도로 대사도 적을뿐더러 감정 표현 자체도 사실상 전무하단 느낌이다. 수용소에 다양한 인종이 뒤섞이고 사선을 오가는 위험이 있다곤 하지만 굳이 사울을 이렇게 그려낸 이유는 관객들이 이 상황을 주시할 수 있게끔 유도했을 것이다.
4 대 3 비율 프레임으로 사울의 등 뒤를 끊임없이 따라붙는 연출법도 그 비현실적인 상황이 유발하는 답답함을 관객에게 전함과 동시에 반대로 사울 없이 이 전쟁의 현상을 주시할 수 없는 제약을 건다. 그는 이 현장의 중심이자 가리막인 셈이다. 다른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안달인 발가벗은 사체들은 <사울의 아들>에서 배경으로 배치된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인상적인 환경을 구축해 관객에게 잊지 못할 잔상을 남기기도 한다.
목숨을 걸고 아들의 시신을 매장하려는 아버지의 고군분투. <사울의 아들>은 이 핵심 이야기에도 마냥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작품에서도 의도적으로 사울의 아들에게 '의문'을 하나 쥐어줘 사울이 하는 행동을 다시금 고찰하게 한다. 결국 사울이 옳은지 아닌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카메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울의 등 뒤에서 이 모든 순간을 포착하는데 주력한다. 이 좁디좁은 프레임에서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려는 사울의 발버둥은 계속해서 물음표를 찍으며 관객에게 다가온다.
<사울의 아들>은 좁은 프레임을 질문으로 확장하면서 관객들을 장악한다. 딱 짜인 영화에도 '체험'이란 경험으로 느껴지는 건 그만큼 사운드가 주는 현장감과 만행이 만들어낸 배경들 등 복합적인 요소의 융합이 만든 순간이 살아있기 때문이고, 또 그 순간들이 관객들에게 묻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