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허둥대도 샤말란의 감성은 충분
한때는 그를 좋아하는 감독 1순위로 뽑기도 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회상할 정도로 까마득하지만 <식스센스> 이후 <레이디 인 더 워터>까지 기복이 많았지만 일관된 샤말란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아앙의 전설>을 본 관객들에게 <라스트 에어벤더>로 똥을 먹이기 전까지.
그래서 <23 아이덴티티>는 반갑다. 북미에서 공개한 이후 꾸준히 호평을 받는 걸 지켜보면서 '드디어 돌아왔나' 싶었고, 실제로 작품을 본 이후에도 '마침내 돌아왔다' 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는 샤말란 감독 특유의 복선과 회수, 그리고 장르 비틀기가 홀연히 살아있다.
샤말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특유의 긴장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빌리지>나 <언브레이커블>을 보면 인물들 간의 갈등이 뚜렷하다기보다 기묘한 분위기와 인물 간의 일명 '밀당'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23 아이덴티티>는 '소녀들을 납치한 해리성 장애자'라는 상하관계가 명백한 스토리를 취하지만 거기에도 사냥의 기본 속성을 이해하는 소녀를 배치해 또 다른 긴장감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샤말란 감독이 기존 작품에서도 사용했던 초현실적 목적을 꾸준히 제시하면서 호기심을 유발하곤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전반부를 지나 다소 설명적인 중반부를 넘어서면 '사냥꾼 VS 괴물'이란 구도는 애초에 맥거핀이란 듯 넘어가는 건 아쉽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것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가장 기대를 갖게 한 요소가 잘라나간 느낌이다.
그런 아쉬움을 채우는 건 물론 제임스 맥어보이의 환상적인 연기다. 한국 제목처럼 23개의 자아가 전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성별과 나이를 넘나드는 인물로 동화된 그의 연기는 말할 때의 버릇 같은 작은 것부터 걸음걸이 같은 큰 몸짓까지 변화무쌍하다. 어설펐다면 웃음이 나왔을 법한 장면도 숨죽이게 하고, 반대로 유치할 수 있는 대사조차 유머로 승화한 건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또한 한 때 <쏘우> 시리즈, <호스텔> 등으로 한참 붐이었던 이 장르를 지금 이 시점에서 이렇게 재현했다는 것도 영화 외적으로 흥미롭다. 씨네 21 한줄평만 봐도 여성을 피해자로 내세운 장르가 더 이상 쾌감이 아닌 불편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왜 굳이 샤말란 감독은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이 작품을 이끌었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23 아이덴티티>는 결코 명작은 아니다. 전개에서 대화의 의존도도 높고 '낚시'라기엔 다소 허둥대는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샤말란 감독 특유의 색이 명백히 묻어나는 수작이란 점, 그리고 마지막 1분에 쏟아지는 경악할만한 팬서비스는 팬들이라면 감탄할 수밖에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