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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이 정도의 쓸쓸함이라면, 좋다

by soth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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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어느날>의 포스터를 접했을 때부터 종종 잊곤 했다. 이 영화는 이윤기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다소 해사해보이는 티저 포스터와 로맨틱 코미디 같은 메인 포스터를 보면 배우 김남길과 천우희는 보이지만 이윤기 감독의 기운은 어쩐지 뒤에 숨은 듯했다. 어떤 영화일까 궁금한 마음은 그래서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난 <어느날>은 어땠느냐. 전체적으로 보면 그럴싸한 작품이 되고 싶었지만 마지막에 헛발을 내디딘 영화다. 인간 남자와 영혼 여자, 이 기묘한 만남을 초기만 넘어서면 마치 일상처럼 과정을 그려내느 <어느날>은 그런 소소함과 나름대로 중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첫 장면부터 강수(김남길)의 문제에서 시작하고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미소(천우희)의 문제와 교묘하게 봉합해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여기까진 좋다. 그러나 이 문제가 결코 쉽게 다뤄질 수 없음에도 이 과정을 그리느라 시간을 소비한 영화는 다소 느닷없이 막을 내린다. 감정적인 해소,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기엔 오히려 엉뚱할 만큼 결말까지 이르는 속도가 빨라서 몰입을 깨버린다. 특히 클라이맥스로 흘러가는 동안 전체적으로 담백했던 톤이 다소 과장돼 촌스럽다는 느낌마저 줘 그런 결말에 이입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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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완전히 졸작이냐, 그건 결코 아니다. <어느날>은 지적한 후반부만 제외하면 장점이 더욱 부각되는 영화다. 투톱으로 나선 두 배우의 환상적인 케미스트리와 연기력은 보는 내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무기력하면서도 점차 활력을 찾아가는 강수를 김남길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성했고, 천우희는 그동안 맡았던 배역들에서 벗어나 20대 여성의 발랄미와 풋풋한 감정표현으로 영화에 활기를 더한다. 실제로 영화도 두 사람이 만드는 이미지 자체를 영리하게 이용해 재미를 더하는 편이다.


거기에 이윤기 감독이 순간순간 포착하는 아름다운 영상들이 더해져 <어느날>은 예쁘면서도 쓸쓸한, 특별함을 뽐내는 것이 아닌 일상에 녹여내는 방식을 선사한다. 영화 중간중간 툭툭 무심한 듯 보이는 롱쇼트들도 단순히 강수와 미소의 모습을 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심리 저변에 깔린 쓸쓸함을 짚어내 인상적인 장면을 만든다.


이런 장점이 있음에도 그 모든 건 후반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정작 속도감으로 승부하는 그 결말에서 무너져 내린다. 114분이란 짧지 않은 시간에도 <어느날>이 공허한 느낌을 주는 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느꼈을 감정을 극적인 문제로 몰아세워 잊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과거와 관계에 힘을 실었던 만큼 좀 더 세심한 결말을 준비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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