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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도동 Feb 16. 2024

[일일일글] 순서

나의 <오늘의 일정>에 융통성이 생겼다.

 태어나서 한 번도 오늘의 할 일을 100% 해내본 적 없는 파워 P가 바로 저랍니다. 저는 계획을 하는 건 좋아해요. 예측할 수 없는 오늘의 윤곽을 두루뭉술하게나마 잡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딱. 그 테두리 안쪽에서 놀면 되거든요. 만약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고요. 저에게 하루 일정을 적은 체크리스트 수첩은 그런 역할입니다. 망아지 같은 저를 위한 엉성한 울타리.

 그런 것치곤 순서는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길을 걷더라도 빨간 보도블록만 밟고 다니거나, 항상 두 번째 화장실만 이용한다거나 하는 등 저만의 쓸데없는 철칙이 있었거든요. 그게 깨지면 굉장히 스트레스받아했던 것 같아요. 체크리스트를 해 나가는 순서를 꼭 지켜야 하는 것도 제 철칙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만약 순서가 어그러지면 그날은 저에게 그냥 망한 날이었어요. 모든 계획을 다 지키지 않고, 얼른 깨끗하게 비워진,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내일만 기다렸어요. 그런데 요즘에서야 저는 좀 달라졌어요. 순서가 없어졌거든요. 되도록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쓰자고 다짐했지만, 오늘도 저녁에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제 하루 일정 체크리스트에 들어가는 내용은 블렌더 (3D 모델링 프로그램)로 애니메이션 하나 만들기와 그림 그리기, 글쓰기예요. 자잘하게 남는 시간들에는 다양한 것들을 해요. 명상과 운동을 해요. 책을 읽고, 산책하고, 고양이도 돌보고, 도마뱀도 봅니다. 아, 식물에 물을 주고 선풍기도 틀어주고요. 아무튼, 주요 일정은 앞의 세 개 정도 될 것 같아요. 매일같이 체크리스트에는 순서대로 적어놓지만, 순서를 지키지 않아요. 융통성 있게 하고 싶은 것부터 합니다. 순서가 어그러졌다고 해서 그날이 망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여유가 생긴 걸까요? 자는 시간을 정하지 ㅇ낳아서 하루가 더 길어졌기에, 지금이라도 하면 성공한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순서가 바뀌어도 괜찮은 날들입니다. 머 하나 빠지더라도 괜찮아요. 매일이 완벽하면 사람이겠냐며 여유를 가지고 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의외로 제가 계획적이지 않아서, 즉흥적이고 딴 길로 새는 사람이라서 더 추진이 잘되는 일정이 있어요.

 (물론 잘하는 분들이 보기엔 너무 부족한 실력이겠지만..!) 3D 프로그램을 한 번도 다루어보지 않았다가 짧은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는 지하철을 먼저 완성해 보자는 마음으로 후딱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실 다른 일정들을 매일 지켜지지 않았어요. 그게 그림이었고요. 그래서 중간중간 많이 힘들기도 했어요. 내가 그림밖에 잘하는 게 없는데, 그림을 이렇게 놓고 있어도 되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그림 그리는 시간을 잠시 없애고 융통성 있게 한동안은 모델링에만 신경을 쓰지고 융통성 있게 행동했더니, 오히려 내가 지금 뭔가를 하고 있다-라는 결과물이 더 빠르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알았어요. 하루 일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번씩은 체크리스트에서 벗어나 딴 길로 새도 열심히만 걸으면 얻는 것이 있다고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매일 계획하려고 해요. 그리고 융통성 있게 활용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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