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일글] 선함과 호감

착한 사람과 호감인 사람은 저얼말 별개였다.

 우리 가족들은 스케줄이 저마다 달라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요. 평소에는 자기 전에 보기만 해도 매일 본다고 생각할 정도거든요. 그래서 어제 하루는 제가 시간을 내어서 엄마, 동생과 함께 코스트코로 장을 보러 갔습니다. 글에 묻어 나오는 것과는 다르게 평소에 저희 가족들은 엄청 친하게 잘 지내는 편입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단련된 감정 맷집으로 적어도 겉으로는 편안해 보이는 것 같아요. 꼭 어제처럼 기분 좋게 시작한 날에 문제는 발생합니다.

 다행히 어제는 평온하게 끝나 다행힌 하루였지만요, 다 같이 모인 날, 가해자 아빠와 피해자 엄마가 긴밀하게 연관 있는 제삼자들인 저와 동생이 함께 있으면, 유난히 아빠를 공격합니다. 물론 이해는 해요. 맺힌 게 많으니. 미리 말하자면, 아빠는 기혼 남성이 하면 안 되는 일, 딸을 두 명이나 둔 아버지가 하면 안 되는 말 등 아무튼 간에 모든 상황을 다 생략하더라도 인간이라면 안 해야 하는 일들을 참 많이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모른 채 지금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면 착한 것과 호감이 느껴지는 것은 별개구나 싶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 마음도 여리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너무나 잘 느끼는 바람에 배려가 엄청납니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서는 밖에서 꽉 조였던 인내심을 과식한 사람이 벨트를 풀듯 풀어헤쳐버립니다. 갑자기 시니컬해지고, 화에 브레이크가 없어져요. 물론, 여기서 제가 맞받아치지 않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넘기면, 엄마는 다시 사회생활 잘하는 소녀 같은 중년 여성으로 돌아오긴 해요. 그런 엄마를 보니, 어쩌면 밖에서 착하고 배려하는 섬세한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착하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은 엄마, 엄마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저의 호감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어요. 착한 건 알겠어, 하지만 적어도 엄마가 나에게 호감은 아냐, 좋긴 해, 좋은데 불편해. 이런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회생활을 하다 만난 착하고, 배려있고, 약간은 소심한 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호감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불편함을 느낍니다. 저 사람도 집에 가면 돌변할까? 나랑 가까운 관계가 되면 나에게도 화를 잘 내게 되는 걸까? 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아빠는 다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아빠는 본능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많은 상처를 준 어쩌면 진짜 나쁜 사람. 착한 사람의 인내심과 인성은 다 버려놓고, 본인은 스트레스 없이 사니 아이러니하게도 밖에서는 사람 좋다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말하다 보면, 농담도 잘하고 센스도 있어요. 남 눈치를 보며 발생한 배려가 아니라, 그저 자기는 편한 대로 있다가, 타고난 넓은 시야 덕분에 보이는 남들의 불편함을 별생각 없이 잘 해결해 줍니다. 별 생각이 없기에 그 배려는 건조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편해요. 그래서 요즘에 엄마에겐 미안한 행동과 생각을 하는 중이에요. 지금은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은지 꽤 된, 갱생 중인 아빠에게 자꾸만 과거의 일을 줄줄이 꺼내서 집안 분위기를 나쁘게 만드는, 너무 착해서 오히려 나빠진 엄마에게 뭐라고 하거든요. 호감형 아빠에게 자꾸만 뭐라고 하는 선한 엄마. 이 아이러니는 칼이 되어 엄마에게 꽂힙니다. 아빠 요즘에 안 그러잖아. 이혼할 거 아니고, 노년에 돈 벌기 싫다며. 지금 축적한 재산이랑 연금도 엄마 덕이라서 꼭 끝까지 받아야겠다며. 이제는 아빠가 아무런 행동도 안 하는데 제발 가만히 좀 있어. 언제까지 그럴 거야?라고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엄마에겐 못된 딸, 아빠에겐 뒤늦게나마 편들어주고 농담도 잘하는 딸이 되었지만.. 사실 그냥 둘이 해결을 어떻게 봤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저도 아빠 닮은 딸이라 남들 일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거든요. 눈치본 배려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고요.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도와줘봤자 본전이고, 오히려 원망 듣기 딱 좋은 포지션이 지금 바로 제 자리. 아내에게만 나쁜 아빠, 그런 아빠에게 당한 일들을 올알이 하던 어린 딸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지금도 하는), 착해서 당하고 살았던 엄마를 둔 첫째 딸 자리입니다. 덕분에 제가 얻은 건 사람에 호감을 느끼는 이상한 기준뿐이네요.

-  표지 일러스트 출처 :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