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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춘노 Aug 01. 2022

영화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며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배우들이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역할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아마 너무나 위대한 사람을 연기한다는 것 아닐지. 그리고 그 대상은 꼭 집어서 이순신 장군님이 아닐지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주인공급인 대상을 연기하는 처지에서는 부담이 클 테지만, 이번 영화 ‘한산’의 이순신 장군은 박해일 배우가 도전하였다. 

     

  아마도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결말이다.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는 이순신 장군의 대승인 해전이다. 그런 영웅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김한민 감독은 ‘명량’,‘한산’,‘노량’이라는 시리즈를 각기 다른 배우로 이순신을 담고자 했다.      

  너무나 대단한 전공이고, 아마도 조선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웅을 우리는 왜 영화로 보는 것일까? 나는 영화를 보고, 그런 생각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 영화에 열광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떠한 생각하고 영화를 봐야 할지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장이다. 그걸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어쩌면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였기에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고, 상사와의 마찰은 훈장처럼 따라다녔다. 실제로 선조의 시기와 질투는 마지막까지 이순신을 사지로 몰았을 것이라고 누구나 추측한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의 깜짝 발탁. 사실 이건 선조의 선택이었다. 전쟁이 시작하기 불과 1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것도 그러하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날에 거북선이 완성된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영화 같은 건 이야기를 중시하는 후대의 입장에서는 참 소름 끼치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1년 전에 그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과 같은 준비와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까?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러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다고 본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도의 바다는 거의 전멸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모두가 그의 입을 지켜봤다. 본인의 선택이 곧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도 충분하게 알고 있다. 보는 이도 말하는 이도 알고 있기에, 그의 말과 행동은 일관적이다. 건조하고, 무겁고, 고뇌한다. 오히려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했기에 부하들은 무한한 신뢰를 보인다. 


  사실 선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자리도 어차피 비어 있으니 누구나 앉을 수 있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오로지 준비된 자만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절대적인 승리가 필요한 상황에서 누구나 그 자리에 걸맞은 행동과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균이다. 또한, 원균 때문에 이순신의 자리가 결코 독단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 끊임없이 이순신과 대립하며, 결국 그의 자리까지 빼앗는 원균을 품어서라도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선조의 질투와 시기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괴멸적인 수준의 수군의 피해에도 승리를 이룬 영웅이다.     

  영화에서는 1592년이라는 과거를 보여주지만, 그걸 스크린에서 보는 현재는 2022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이 시대가 다르다고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일까? 역사는 가정이라는 것이 금물이다. 따져 본다면 이럴 수 있다. 아마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곧 왜군이 침략해온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1년 동안 피나게 준비를 했고, 실제로 그 이전부터 스스로 자리에 맞는 준비를 해왔기에 가능한 전쟁 준비였다. 그리고 빌었을지 모르겠다. '이 준비가 아무 소용이 없기를' 하고 말이다. 


  결국 전쟁은 일어났고, 무능한 경상도 수군은 전멸했다. 그리고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을 가서 여차하면 만주로 가려고 하는 상황. 후세의 입장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존재라도 있었기에 참 다행이지만, 준비된 자가 자리에 있었다면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쩜 그 정도 피해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지금의 나는 어떤가? 준비되지 않은 스스로가 자리를 탐하지 않았나? 아니면 게으르게 살고 있지 않았는지. 또 내 주변은, 지역은, 나라는 다를까? 나는 그것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중은 위기의 순간에 영웅을 소환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과학이 주류인 현재도 그렇다. 아마도 지금도 우리가 이순신 제독을 소환하는 것도 그런 의미 아닐지. 영화를 보는 내내 스스로를 반성해보고, 답답한 세상을 보며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노력하기를 기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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