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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춘노 May 27. 2023

사람이 불편한 독거남의 축제란

남원 토박이의 <춘향제>를 몸으로 느끼다

  난 남원 토박이다.

  내가 자란 곳에서 태어나고, 결국은 마흔이 넘어서도 이곳에서 일을 하고 부모님과 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5월에 되면 항상 기대가 가득했다. 석가탄신일을 기준으로 춘향제가 열렸고, 전야제에 폭죽과 다음날에 길놀이. 어여쁜 춘향이를 뽑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주막이나 노점에서 먹는 음식이 즐비한 천국이었다. 길거리 음식과 각종 뽑기와 구경거리는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길놀이 행사에 전통 옷차림을 입고는 시내를 행진했다.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연습도 했고, 의상을 위해서 다들 전통시장에서 옷도 구매했다. 두 번의 모든 행사에서는 방자 옷을 입었다. 그렇게 엉성한 모습으로 할머니와 찍은 기념사진이 아직도 있다. 


  추억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난 춘향제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취업 준비를 위해서 서울에 올라간 상황에서 춘향제보다는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 쉬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솔직히 귀찮았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웠으며, 어수선한 그런 행진에 보탬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입사를 하고, 일과 더불어서 행사에 참여했다. 주로 주막에 가고, 행사 부스 지키는 진행 요원이었다. 결국은 행사를 즐길 마음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코로나가 터지고는 사람 들고 모일 일은 전혀 없었고, 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매일이 타인과의 거리 측정과 강약 조절에 고민하는 입장에서 축제는 반갑지 않다. 

  또 춘향제는 이제 전국적으로 늘 진행하는 많은 축제들 틈에서 손에 꼽히는 축제는 아니었다. 그만큼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쟁이 치열하기에 흔히 말하는 컨셉을 잡는 것이 오히려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시작된 춘향제였다. 


5월 25일 춘향제 행사 첫날의 우리 공연

  축제를 위해서 정말 온 행정력과 주민이 참여된다. 과거에 춘향이라는 이미지는 고귀해서 뭔가 지역축제의 범주를 벗어난 전국 단위의 관심을 받던 때도 있었다. 올해의 춘향이가 누구였는가가 뉴스에 나오거나 선발 방송이 티브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전야제 다음날에 이뤄지는 길놀이 행사에는 온 남원에 중고등학생이 각자 분장을 하고, 길을 나왔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주민들과 가족, 친척들이 필름 카메라에 추억을 담았다. 


  지금은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보다도 그리고 입사를 했던 시점보다 더 인구가 줄었다. 그런 와중에 우리 면은 평일에 여러 파트 중에서 기생점고를 맡았다. 정말 적은 예산과 짧은 기간 동안 준비를 하면서 흥과 관심이 없다면 절대 안 되는 것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막상 분장을 하고, 선비복을 입고는 결국 카메라를 들었다. 사실 살짝살짝 몸에 율동을 넣어 봤는데, 결국 굴욕만 느끼고는 내 본업에 충실하게 모두의 추억과 시간을 담는데 집중했다. 


  평소에는 눈인사만 조심스럽게 했던 주민들과 업무적으로 일만 하던 직원들이 저렇게 차려입고 길을 걷고 있으니, 신기하기만 했다. 과거 길놀이를 참고하려고 봤던 영상에서 10년 전에도 내가 알던 직원들 모습을 보았다. 풋풋했던 모습의 과거와 현재는 좀 다른 반전을 느꼈는데, 내가 그 기록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주민과 직원들이 연습한 결과이다

  그렇게 잘했다는 말을 들으며, 첫날의 행사를 마치고는 녹초가 된 다음날에 뒷정리를 하면서 내가 찍었던 사진을 다들 단톡방에서 공유했다. 이미 발 빠른 사람들은 다른 영상 채널에서 본인들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금에 다시금 고생한 직원들과 인근 면에서 열었다는 주막에서 술 없는 조촐한 먹방을 찍었다. 앉을 곳이 부족해서 두 명이 앉으면 편할 자리에 네 명이 앉아서 술 없이 먹는 안주를 먹었다. 아마도 이런 것은 복직을 하고 처음이 아녔을까 싶다. 보통은 편안한 사람과 한 끼 먹기는 하지만, 멤버 조합도 참 새로운 구성이었다. 아마도 축제이기에 가능한 자리였을 것이다. 

축제 주막에서 직원들과 함께

  축제답게 배가 부른 상태로 걸었다. 빛이 나는 길을 걷는 모습은 불나방과 같았지만, 저마다의 상황은 다르겠지? 직원들과 걷는 행사 구경도 나름 신선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하지 못 했을 말도 툭툭 할 수 있어서 모처럼 속마음도 털어놓았다. 


  난 복직하고, 지금의 직원들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다. 불과 1년 전에는 이름도 몰랐던 사람이다. 오히려 길을 걷다가 만나는 대다수의 직원과 사람들이 가까웠으나, 그마저도 불편했던 과거의 나였다. 수다스러운 아저씨의 모습으로 거의 1년 간 살아가고 있지만, 매일 난 꽤 노력하고 있다. 


  사람이 무섭지만, 축제에 선비복을 입고 행진을 했다.
  사람이 불편하지만, 직원들과 함께 불금의 축제를 즐겼다. 
  사람을 믿지 않지만, 그들과 그녀들을 난 살짝 의지하고 있었다.

 

  미리 난 말했다.


  "난 사실 사람을 기억하는 걸 못 한다. 또 얼굴도 못 알아보고, 이름도 못 외운다."


  "그래서 잊힐 때쯤. 꼭 연락을 한다. 그러니 뜬금없이 연락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


  잊힐 무렵에 찾는 연락은 애타는 감정을 담은 내 마음의 표현이겠지? 그렇게 술은 먹지 않고, 후식을 먹으며 잘 넘겼다 싶었는데, 전화가 왔다.


  지리산에서 함께 일 했던 직원의 부름이었다. 


  '잊힐 때쯤 날 찾는 전화가 이렇게 오는구나.'

  결국 지리산에서 인연을 맺은 직원들 틈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이미 시간은 저녁 11시를 달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른 시간부터 몇 번은 치우고, 보태졌을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튀김과 닭발이 나왔다. 매콤한 것이 막걸리 안주로 제격이다. 그런 끝물에서 술취한 인사가 오고갔다. 


  그렇게 나 때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막내 곰과 집까지 걸어갔다. 지금도 한껏 몸이 불어서 걱정인 상태인데, 술을 너무 마신 것 같았다. 본인도 힘든데 날 위해서 전화해 준 마음이 고마워서 다음을 기약했다. 고맙다 나의 형제여.


  나에게 축제는 솔직히 고역이다. 좋은 것보다는 불편하고 힘든 것이 더 많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매년하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한 번씩 찾는 전화나 연락 같은 것이 아닐지? 모처럼 사람이 불편한 독거남은 내년의 연락을 기대를 해본다. 무심하게 스치듯 지나는 자리라도 얼굴과 이름은 다시금 생각 날 수 있게 말이다. 

전전전 근무지에서 열었던 주막에서 안주로 닭발을 먹다
결국 먹걸리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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