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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밤은 어쩜 낮보다 길었다

<매일 만보 걷는 남자> 남원 요천과 광한루 주변을 걷다

by 이춘노

마스크가 슬슬 필요한 날씨다.

외투를 뭘 입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앞서서 얼굴에 한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겨울이 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매일 만보를 걷기 시작하면서 습관처럼 내가 걸어가는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보통 퇴근하면 걷고, 시간만 허락한다면 조금씩 만보를 채우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내 발걸음을 체크했다.

집과 사무실, 차를 오가는 길에서는 솔직히 익숙함을 넘어서 지루함까지 느껴지는 무덤덤한 일상. 시선은 오로지 정면만 보았다. 그나마 룸미러를 통해서 뒤를 돌아보긴 해도, 결과적으론 누군가 나를 쫓아오는 가를 감시하는 정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느 순간부터 차분하게 걷다 보니 하루의 만보를 걷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급작스럽게 뭔가 변하는 것은 사실 없다. 8월보다는 몸무게가 좀 덜 나가긴 했지만, 비만인이 살이 좀 사라졌다고 비만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별로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못 입었던 셔츠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이나 허리를 감싸는 바지의 치수가 좀 헐거워진 것이 삶의 소소한 만족을 주는 정도랄까?

평소처럼 만보를 걷다가 문뜩 주변을 돌아보니, 꽃이 피었다. 그래도 해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무렵이라서 카메라의 빛도 적당하니,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간혹 사람들이 묻는다.


"춘노씨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네?"

아마도 남자가 맛있게 나온 음식 사진을 주변 의식 없이 찍거나, 행사나 여행지에서 거리낌 없이 셔터를 누르는 모습에서 신기함을 표현한 질문일 것이다.

사실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신규 시절부터 단체 사진이나 보고용 사진을 남겨야 했던 실전 공무원이 취미가 더해진 것이고, 글을 쓰다 보니 브런치를 위해서 더 열심히 찍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해서 독서하고, 무수한 메모를 하듯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핸드폰이나 카메라의 여러 기능을 시도하면서 찍는 습관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아마 만보를 걷기 시작하며 체중도 줄지만, 체력도 늘어나니 슬슬 주변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무작정 걸었던 지난 9월과는 다르게, 길가에 핀 꽃도 눈에 들어오더니 미세한 빛으로 사진을 찍어보니 분위기도 제법 달랐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고, 비가 주로 내리던 우중충한 하늘보다는 맑은 하늘이 주는 청량감도 달랐다. 그리고 퇴근 후에 해가 일찍 넘어가다 보니, 야경을 볼 수 있는 것도 감상을 더 끌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걷던 길이다. 최근에 좀 걸었다고 해도, 과거에 살을 빼보려고 수없이 걸었던 요천 운동 코스를 퇴근하고 지쳤을 나는 무심하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걷던 길을 살짝 일탈해서 광한루 돌담 주변을 걸어 보았다.

사람들은 남원에 오면 주로 광한루를 구경하는데, 나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야경을 감상하라고 지인들에게 말한다. 청사초롱을 길가에 쭉 달아 놓았지만, 그것을 더 느낌 있게 사진을 찍고 분위기를 충전한 곳이 광한루 돌담길이라고 생각해서이다. 광한루 안을 구경하는 것도 좋겠지만, 쌀쌀하지만 그래도 걸을만한 가을밤에 조명으로 분장한 이색적인 공간에 빠진다면,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을까?


가족이나 연인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도 추억이 될 것 같고, 혼자라면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이 길을 걸어도 눈으로 계절을 한 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이곳에 살면서도 몰랐던 풍경을 걸어봐야 느낄 수 있었다. 만약에 만보를 걷지 않았다면, 낮에 쌓였던 피로로 원룸방에서 식사하고 바로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퇴근 후에 한 시간 반을 사부작 걸어보니, 나의 낮동안의 고통은 이 짧은 밤을 위한 여정이었다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만 남았을 풍경도 찍을 수 있었고, 그것을 주제로 글을 쓸 수 있으니 더없이 긴 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분도 계절이 가기 전에 한 번은 보았으면 좋겠다.

광한루의 밤과 정취를 한 잔 드셔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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