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너질 때 마시는 술

친구가 사준 발렌타인 양주를 마시는 이유

by 이춘노

"공항 갔다가 면세점에서 샀다."


힘든 시절에 함께 30년은 넘게 절친으로 지내온 친구의 선물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종종 나를 만나면서 친구는 술을 선물했다. 이 양주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고, 12년 산은 그래도 지갑을 열 정도는 되더라도 양주는 양주다. 향이 좋아서 난 밸런타인 양주를 좋아했다. 아마 그걸 잊지 않고 면세점에서 사 온 것이다.

휴직을 하고, 다시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면 복직한 친구를 위한 선물치 고는 너무 유흥적인가? 사실 그건 이유가 있다.


20대의 후반에 나는 편의점 알바를 했다. 평일 새벽 알바를 하는 입장에서 금요일 밤과 토요일 밤에 쉬는 날에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고, 컵라면에 소주를 마셨다. 값싼 소주가 남는 것이 아까워서 한 방울까지 털어 먹는 기간이 늘어나자. 친구는 주말에 식사를 하고, 종종 좋은 맥주를 사주곤 했다.

"그래도 독한 것보단 맥주가 좋겠지?"

중독이 되지 말아야겠는데, 잠을 자라고 사준 술이었다. 그리고 입사를 하고는 내가 독한 홍주를 한 병 마시고 자는 것을 알자. 1년에 한 번은 양주를 선물해 줬다.


"소주는 다 먹어야 하니, 놔뒀다가 먹고 싶을 때 한 잔씩 마시고 자."


그 후로 나는 친구의 선물을 가까이 두면서도 살면서 힘든 시기에 한 잔. 혹은 두 잔 이상은 잘 마시지 않았다. 이 양주가 2022년 말 어느 겨울에 받은 것 같으니. 3년을 두고두고 마신 것 같다. 사실 기쁜 날에 마시라고 사준 것 같지만, 실상은 너무 힘들 때 마셨던 것 같다.


이를테면 사람의 감정에 힘들어서 치킨에 한 잔. 2024년 12월부터 이별을 하면서 죽을 것 같은 날에 한 잔씩. 그래도 두 잔은 넘게 마시지 않았는데, 어제는 세잔을 마셨다. 벌써 양주의 반을 마셔 버린 것은 어쩌면 내 공허한 마음과 같을까?


2014년 8월. 편의점 알바를 안 하고, 직장이 생긴 이후에 나의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방에서 사회복지 9급으로 시작하는 32세의 청년은 포부도 컸을 것이다. 결혼도 했을 거 같고, 그때는 총무 주사님의 말씀처럼 7급 정도 되어서 10년 차 공무원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런데 말이다. 나는 아직 8급이다. 사기업으로 치면 만년 사원 느낌의 위치인데, 팀에서는 팀장님 다음이다. 나의 두 차례의 휴직이 있었으니 그렇겠다 하지만, 글쎄. 꼭 그런 것만 그럴까? 진짜 내가 무능하기에 내 자신감이 부족해서 승진도 전입도 어려운 걸지. 복잡한 집안일과 내 아픈 마음. 이별과 힘들어지는 업무. 그 틈에 나는 44세가 되었다.


어차피 살아봐야 인정도 기쁨도 없는 삶이라면 빨리 정리하는 게 이득일 건데. 할머니의 푸념같이 죽지 못해서 살고 있다. 이제 사람과의 대화도 싫다. 타인들에게 내 살 떼어주는 바보같은 삶을 살다가 비루해진 지금의 삶으로 떨어지는 것이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냥 이대로 침전하는 것일까? 아마 이대로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안주 없이 양주를 세 잔 들이키고는 잠시 생각했다. 사실 머릿속은 참 많은 것을 돌아기게 하지만, 나는 무너진 것이 맞다. 그래도 힘든 날이 많을 것이기에 더 이상 마시진 않았다. 그래도 반병이나 남았으니, 내일 이후에 춘노를 위해서 남겨는 둬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