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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춘노 Jun 30. 2021

나는 누구인가?

메모쟁이가사는 방법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자신을 스스로 한 단어로‘메모쟁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습관이 있다. 내가 아는 지인은 점에 난 털을 가만 놔두지 못하거나, 일하는 책상 정리에 병적인 사람도 있다. 나에게도 조금은 광적인 습관이 있다. 바로‘메모’이다. 보통은 이런 고상한 습관을 말하면 성공한 위인을 떠올린다. 그리고 대부분 기분 좋게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으나, 실상은 위대한 사람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


  메모의 시작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였지만, 그 당시는 공부를 위한 노트 필기에 남들보다 조금은 꼼꼼한 첨삭 수준이었다. 그러다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학생들이 쓰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에 수업시간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노트에 옮겼다. 그리고 주머니에 푼돈까지 적은 농협 가계부와 개인적인 내용까지 담은 다이어리까지 총 3권을 가방에 가지고 다녔다. 

  배가 볼록한 가방 속에서 꺼낸 노트로 수업시간엔 사초를 적는 사관처럼 수업을 들었다. 나름 학점에는 도움이 되고, 주변 친구들에게 노트를 빌려주며 ‘인맥 유지’ 장점은 있었다. 하지만 어린 메모광은 첫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순간에도 지출한 현금 액수와 내용을 적어야 했다. 혹시 영수증이 없는 순간에는 음식점 매장 휴지로 기록을 해서 보관해야 안심이 되는 강박 증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날 저녁엔 하루 마감을 노트 3권에 나눠서 꼬박꼬박 적는 것이 마무리되어야 잠을 잘 정도로 철저했다. 이러한 습관이 나의 인생의 큰 도움을 주어 꿈을 이룬 사람이 되었는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더벅머리를 하고서 뿔테안경을 쓴 고지식한 젊은 꼰대 정도로 인식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중에 소수는 수업시간 필기 복사 부탁으로 친한 척했지만, 가까이하고픈 여자들은 나를 멀리했다. 생각해보면 현금 300원 지출을 수첩에 세세하게 기록하는 남자가 내 생각에도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큰 업적도 아닌 이러한 습관이 시간이 갈수록 부담이 됐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 쌓여가는 노트들로 몸살을 겪는 것도 문제 이만, 필기에 집착하는 습관 자체가 나에게 정신적 피로감을 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금 곧 나는 마흔이 된다. 십수 년의 메모 습관에 나는 스스로와 타협했다. 노트 한 권으로 모든 기록을 하고 있다. 업무적인 기록과 개인적인 기록이 뒤섞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그날의 할 일과 일과를 적고 진행 중인 사항은 파란 펜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마무리된 것은 붉고 굵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그리고 한주가 되면 그 기록을 한 번 훑어본다. 

  누군가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손 아프게 노트에 적느냐고, 그냥 스마트폰에 기록하면 편할 것을 사서 고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면서 미련하다고 한다. 사실 나도 미련하다고 생각이 든다. 손도 좀 아프고 글씨체도 악필이라서 내가 쓴 글씨도 못 알아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적는다. 그리고 지금은 그림책을 보는 느낌으로 다시 노트를 본다. 모든 메모는 감정과 표정이 존재한다. 내가 고향에서 봤던 과거의 기록에서 간절함과 당당함이 활자로 표현된 그림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위인이 아니다. 실수투성이 인간으로 시행착오를 해오면서 서른일곱 해 봄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오늘도 수없이 메모를 적어놓은 노트를 펼쳐 놓는다. 개인적으로 사회복지 업무를 떠나서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라면 메모장을 추천한다. 나 또한 지리산에 들어와서 메모의 습관은 더 투철해졌다. 

  오늘은 목표한 글을 써보겠다는 일념으로 책상에 앉아서 끄적끄적 몇 글자 적지만, 노트에 기록된 나는 그 누구보다 성실했던 하루를 보낸 사람이다. 이렇게 하루를 위해 기록한 노트는 쌓여 다음을 위한 나를 위해서 쓰일 것을 알기에 수고스러움을 감수한다. 진정한 메모쟁이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 이 글은 2019년에 작성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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