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
중고등학교 시절 다이어리에 내가 가장 많이 끄적이던 건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었다. 좋아하는 노래, 글귀, 연예인, 이상형, 갖고 싶은 것들, 하루 중 잊고 싶지 않은 기억 등등.
남이 좋아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하지만 어른이 되고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걸 굳이 기록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다이어리 같은 걸 그리 꼬박꼬박 쓰지 않을 뿐더러, 남이 좋다는 것들이 주변에 넘쳐나다보니 남들의 추천에 휩쓸리고 현혹되기 쉽상이다. 쏟아지는 광고들과 입소문들, 주변에서 공유해주는 정보들이 너무 많아 이를 다 소화하기도 벅차다. 내가 먹고 싶은 걸 생각하고 메뉴를 볼 겨를도 없이, "이거 맛있어요, 한 번 드셔 보세요", "이 요리에는 이게 또 엄청 어울려요"라며 5분 마다 음식이 계속 서빙되는 형국이랄까.
물론 유용한 추천들도 많다. 하지만 다들 짜장면으로 통일 하는 중에도 내가 먹고 싶은 사천탕면을 반드시 먹고 싶은 마음이랄까. 내 취향, 내 고집을 잊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잊지 않고 추구하며 살고 싶다.
기억과 체질과 경험의 총체적인 집합체, '나만의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가끔 십 년도 더 된 내 어릴 적 기억을 불러오기도 한다. 또는 내 체질이나 건강상태에서 비롯하여 생긴 취향들도 있다. 내 지난 경험을 통한 지혜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들은 남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것'들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나에게 '의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예를 들어, 맛집을 탐방하는 한 유튜버의 추천으로 가게 된 낙지전골집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자주 데려가신 낙지전골집을 찾았을 때 오는 감동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양파가 나에게 주는 의미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좋아하는 것들 중 예전에는 그리 감흥이 없었거나 오히려 싫어했던 것이 있을 수 있다. 이건 나의 변화나 성숙을 알게 하는 지표이기도 해서 삶에 큰 힘이 된다고 한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너무 하기 싫은 일을 맞딱뜨렸을 때 어릴 적에는 싫어했지만 지금은 좋아하게 된 것들의 목록을 한 번 되새겨보면 그 일에 좀 더 너그러워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은 싫지만 나중에는 그 일도 좋아하거나 도움이 된다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예전에는 싫어했지만 나중에는 좋아하게 된 양파, 파, 생강 같은 음식이나 볼 때마다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된 연예인, 퇴사하고 나니 이해하게 된 팀장님 등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달래곤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2023년 여름이 가기 전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리스트로 기록하며 다시 한 번 소중한 '나만의 것'들을 되새기고 거듭 추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 얼음을 가득 넣고 마시는 아이스티: 루이보스나 녹차를 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얼음을 가득 넣은 유리잔에 조금씩 넣어 마시면 하루 종일 차를 마실 때마다 리프레시를 할 수 있다. 커피는 마실 때마다 한 잔 이상 안된다는 죄책감을 주지만 차는 티백 하나를 계속 우려내면서 하루종일 그냥 물처럼 마실 수 있어 좋다. 지금도 글을 쓰며 아이스티를 세 잔째 홀짝이고 있다.
- 연어장: 코스트코에서 사온 연어를 알차게 다 비워 먹을 수 있다. 레몬을 많이 넣어서 레몬향이 나는 연어장을 해 먹었다. 아이들도 잘 먹고 먹을 때마다 건강해 지는 기분. 함께 넣은 꽈리고추와 생와사비를 조금씩 곁들여 따뜻한 밥에 싸먹으면 다른 반찬 없이 한 끼 뚝딱이다. 주변에 한 통씩 선물하면서 또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다.
- 오차즈케: 시어머님이 해 주시는 오이지와 함께 먹는 오차즈케. 오차즈케라 쓰고 찬물에 밥 말아 먹는다고 읽는다. 어릴 때부터 입맛이 없으면 물에 밥을 말아먹었고, 밥을 다 먹은 밥공기에 찬물을 따라 마시면 숭늉처럼 구수하다. 이건 거의 밭에서 새참 먹는 어르신들 수준의 취향이다. 어릴 땐 엄마가 밥공기에 물을 따라 마시거나 하면 지저분하다고 기겁을 했던 나였다. 마흔을 넘기고 어느 순간 부터인가는 나도 밥 다 비운 공기에 찬 물을 따라 마시며 밥 공기에 밥풀을 좀 더 남겨놓을 껄 하고 아쉬워한다.
- 가족들과 함께 먹는 수박: '맛' 그대로 정말 달콤하다. 가족들과 하나의 큰 수박을 잘라 나눠 먹는 다는 게 뭔가 양푼에 비빔밥 비벼 같이 먹듯 왁자지껄하고 유쾌하여 포도, 참외, 자두 같은 개인적인 과일들과는 그 느낌이 아예 다른 것 같다. 엄마가 된 다음부터는 아이들이 먹다남긴 하얀 수박을 마저 깨끗이 먹어치우거나 아이들이 먹기 싫어하는 맛없는 부분을 용케 찾아 먹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도 수박을 '통통' 두드리며 온가족이 수박탐정이 되어 마트에서 맛난 수박을 골라보고, 집에 와서 두근두근 하는 맘으로 '쩌억' 하고 반으로 가르고, '달각달각' 칼로 시원하게 잘라, 저마다 '사각사각' 시원한 소리를 내며 먹는 그 일련의 과정이 그 자체로 여름을 살아간다는 실감을 갖게 한다. 물론, 아이들 눈치 안보고 혼자서 먹는 정육면체로 깍둑썰기 된 수박도 맛있다.
- 맛있는 자두: 여름 중에도 맛있는 자두를 먹을 수 있는 시기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장마가 지난 다음에는 겉모습만 자두일 뿐 자두맛 캔디보다도 못한 자두를 먹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자두는 더 소중하다. 남자라면 예쁘기만 한 애인을 뒀을 때 이런 기분일까. 매일같이 쌀쌀맞고 잘 만나주지도 않다가도 한 번 만나면 상큼하고 세련된 외모로 나를 홀리고 마는 그런 여자같다, 자두는. 간혹가다 맛있는 자두를 한 입 베어 물면, 어느새 난 무더운 여름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고, 여름의 무자비함도 다 용서할 수가 있었다.
- 뚜레주르 밀크쉐이크: 이번 여름 우연히 발견한 메뉴. 다른 패스트푸드점에 비해 달지 않고 정말 순수 우유의 맛이 느껴져 가족들과 밤산책 후 늦은 시간 아이들과 마시기에도 죄책감이 덜함.
- COS 블랙 오버롤 멜빵 바지: 몸매를 다 가려줄 수 있어서 활동하기 편하고, 상의까지 블랙으로 매치하면 키도 커보여서 스니커즈 신고도 자신감 뿜뿜. 많이 캐주얼하지 않고 오버사이즈 느낌이어서 가방만 잘 매치하면 정장처럼 입을 수도 있음. 이 멜빵바지를 검은 셔츠와 함께 입고 친구 할머님 장례식에도 다녀옴;;; 50% 세일가로 득템하여 입을 때마다 그 때 매장 그냥 지나치고 안 들어갔으면 어쩔뻔 하고 뿌듯해 하는 아이템.
- 아디다스 브라운 크롭 셔츠: 나는 웜톤이 맞구나 라는 걸 실감하게 해 준 셔츠. 처음 보는 사람마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안 한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 어쩔 때 보면 우리 딸 다섯살 때 다닌 유치원 원복 같기도 하고, 우리 시어머님은 예전에 다니던 은행에서 입던 은행원복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음. 암튼 크롭스타일이면서도 얌전하여 마흔 넘은 아줌마도 크롭티를 입는 게 가능하구나를 알게 해 준 아이템.
- 아디다스 알파바운스 슬리퍼: 현관을 나설 때마다 내가 가장 신고 싶은 신발. 아이들 엄마로서 너무 격에 맞지 않아 보일까봐 그 마음을 꾹 누르지만 올여름에도 이 슬리퍼는 내 최애 신발이다. 이제 모양만 좀 더 예쁜 슬리퍼로 진화하면 된다. 아디다스, 힘을 내! 원피스에도 신을 수 있게 좀 만들어 봐, 제발!
- 은쌍가락지: 얇게 꼬인 모양의 은반지 두 개. 여름에는 역시 은 악세서리가 제격이었다. 시어머님이 물려주신 건데 휘뚜루바뚜루 어디에나 착용하기 좋고, 주방일 할 때에도 크게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편하다. 심지어 다이아몬드 반지나 다른 금반지와도 너무 잘 매치되어서 좋다. 다이아반지에 레이어링하면 마치 대를 이어 물려 받은 빈티지 다이아반지 같은 느낌을 줘서 캐주얼한 룩에도 다이아를 부담없이 착용할 수 있게 해 준다.
- 프린터: 회사에 있는 레이저 프린터에 비하면 정말 성능이 안 좋은 저렴이 프린터인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날로그형 인간인 나는 모니터에 있는 디지털 문자들을 하드카피로 프린트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격스럽고 감사하다. 요즘 아이들이 영어학원을 끊고 집에서 나와 같이 공부하는데 아이들과 '아멜리 잉글리시'라는 학원이름도 지어주었다. 탭으로 퀴즈를 풀거나 책을 보게 하는 것보다 프린트물을 뽑아서 직접 연필로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아이들도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 여름밤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면 "그래, 가을이 올거야"라는 안도감을, 여름에 대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매미소리는 뜨거운 여름 무자비하게 내리쐬는 햇빛같다. 위에서 아래로 나를 공격해 오는 듯 마구 쏟아진다. 이에 반해 귀뚜라미 소리는 조용히 내 방에 찾아와서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려서 자다가 고개를 들고 두리번 거리기도 하였다. '방에 귀뚜라미가 들어와 있나' 하면서...매우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들리지만 시끄럽거나 방해 되지 않고, 내가 어둠을 헤매서라도 찾아가고 싶은 소리이다.
- 아침바람: 뜨거운 낮이 지난 뒤 찾아온 시원한 여름밤이 주는 기쁨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름의 아침바람이 이토록 상쾌하단 건 올여름 새삼 느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에게도 베란다로 나와 보라며 시원한 아침바람을 쐬어주었다.
- 명상: 나의 경우 한 가지 음악이 머리 속을 하루 종일 맴돌곤 하는데 아이들이 좋아해서 자주 듣는 아이브나 뉴진스 노래가 요즘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침 명상을 시작한 뒤로는 머릿속에서 뉴진스 노래가 깨끗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였고 간증하듯 명상의 효과를 여기저기에 떠들고 다닌다.
- 뉴에이지 피아노: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을 다니다 만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던 나는 올해 여름 두 딸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였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하는 연습은 실로 큰 것이었다. 우선 매번 학원을 가는 것이 큰 고역이었고, 그 연습을 통해 눈으로 확인되는 결과가 있다는 게 큰 경험이었다. 하농과 체르니 말고 뉴에이지를 치는 것이 좋지만 하농과 체르니를 치지 않고는 뉴에이지를 칠 수 없다는 것도 하나의 큰 가르침이다.
- 하루키와 임경선: 오디오 팟캐스트로 아이들 동화만 들려주다가 우연히 임경선 작가의 팟캐스트를 발견하였다. 미혼일 때 연애에 대해 답이 서지 않을 때 무릎팍도사처럼 내가 찾아다니던 컬럼리스트이자 작가인데 이제 임경선 작가님이나 나나 다 딸을 키우는 애엄마가 되어 있다. 종종 책(특히, '태도에 관하여' 강추)을 통해 그녀의 통찰있는 가치관은 꾸준히 접해왔지만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진짜 다시 재회한 것처럼 너무 반가웠다. 주방에서 음식을 할 때에도, 밤에 잠이 안 올 때에도 경선님의 방송을 들으며 라디오 들으며 웃는 재미를 다시 한 번 되찾았다. 경선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무라카미 하루키님의 책들도 다시 읽게 되었고. 이들의 글을 읽으며 브런치에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쓰다보니 이 밖에도 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댓글로나마 계속 업데이트 해야 할 것 같다. 남편이 하라고 해서 올여름 시작한 골프는 무엇하나 좋아할 수 있는 구석이 없는데 앞으로 좀 더 연습하면서 지켜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