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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일한 Nov 01. 2023

오늘부로, 20년간 붙잡았던 삶을 놓아주려 합니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다.



어느새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이 4년이 되어간다. 그저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길이 나의 업이 되고 삶이 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에서 나는 기대 없는 자식이었고, 그저 욕심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나란 존재였다.


그러던 내가 유일하게 고집을 피웠던 것은 바로 미술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집에 와서 항상 그림을 그렸고, 생각보다 잘 그렸기에 재미가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의 앞으로의 20년이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교를 올라가자마자 그토록 원하던 미술 학원을 다녔는데, 그때 누나가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너 포기 안 할 자신 있어?
중간에 포기할거면 지금 그만둬.



없는 형편에 미술 학원을 보낸다는 건 가족 입장에서 정말 큰 결심이었다. 누나의 말이 마치 "마음 단단히 먹어, 누가 책임져주지 않아"라고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말로 들릴 수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공포로 다가왔고,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발을 내디디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나는 그때부터 정말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저 말을 상기시키며 마음을 잡았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버티고 버텨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 이렇게 4년 차 디자이너로서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오늘부로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그만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만두지 못했던 많은 이유 중에 나를 가장 옭아맸던 것은 가족이 나를 위해 보내줬던 지원과 그에 대한 나의 책임감이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며 시작한 일이었기에 중간에 그만둔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불행하다. 몇 년간 지속된 스트레스로 인해 내 몸은 망가져있었고, 이렇게 힘든 직업이 박봉이라는 현실이 더 참혹했다.


물론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많은 부를 얻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자의식 해체를 통해 나를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잘 그렸기에 미술 학원을 다녔고, 미술 학원을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입시 미술을 준비하고, 그렇게 디자이너가 되었다. 나는 디자인을 잘해서 디자이너가 된 게 아니었다.


이제는 알 수 있다. 나는 상위 1%의 디자이너들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그저 회사들에게 필요한 디자인 업무를 대신해주는 대체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오늘부로 디자이너의 삶을 끝낼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를 위해 일하는 디자이너의 삶을 끝낼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역행자'의 길을 시작하고자 결심한 것이 그토록 놓치 못했던 '다지이너'의 길을 포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의 정체성은 앞으로 '디자이너'가 아닌 그 '무언가'가 될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정체성을 찾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의 20년을 과감히 버릴 것이다. 그래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윤종신님께서 문상훈님과의 토크 중 하셨던 말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의외로 저는 삶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보다 

아닌 걸 빨리 포기하는게 더 좋은 방법 같아요.

포기하면 되게 내가 못나 보이고 그러잖아요. 

근데 되게 현명한 일이 포기예요.'

제 노래 중에 '나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렇게 쓰여있잖아요.

'안되는 걸 알고 되는걸 아는거.."


오늘의 글이 여러분에게도 좋은 영감을 주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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