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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Sep 21. 2019

#39. 무적의 세 단어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물었다.

 "너는 어떤 사람 만나고 싶냐?"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해지곤 한다. 주위에 있던 동기나 후배들은 '하나의 상'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럴듯한 예시를 들기도 했다. 그중 가장 좋은 예시가 연예인이다. 외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 사람이 맡았던 역할이나 노래 등 어떤 부분을 선호한다고 말하면 질문한 사람도, 듣고 있는 우리도 단번에 이해되기 때문이다.


 머뭇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좋아하는 연예인 없냐는 질문이 날아왔다. 세상 일이 이렇게 내 예측대로 움직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말할 연예인이 있나 급히 찾았으나 그게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헤매고 있는 동안 이야기의 주제는 다른 곳으로 넘어갔고 사람들은 뭐가 웃기는지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계속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은가.


 추석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즐거웠다. 막차가 끊길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고 처음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선배와 둘만 남게 되었다. 선배와 나는 집이 근처였기에 택시를 타도 기본요금이면 갈 거리였다. 마음이 한가위처럼 넉넉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고 하던데 뭐든 많거나 적지 않은 상태면 좋은 거 아닌가.


 둘이 남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선배가 말했다.

 “야, 그래서 너는 어떤 사람 만나고 싶은데? 아직도 생각 중이냐?”


 잊고 있었다. 이 선배가 그룹 내에서 기자 활동을 했고, 높은 사람의 비리를 캐냈으며, 그 일로 유명해져서 아예 그룹의 장이 되었던 일을 말이다. 지금도 그쪽 관련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잊지 않는, 물어본 건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끝내 답을 얻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배. 무적의 세 단어 알아요?”

 “요즘 무적이라는 말 잘 안 써. 너도 늙었구나.”

 말을 마친 선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박장대소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웃음의 포인트가 다르면 얼마나 난감한지. 늘 이게 어렵다. 하나도 웃기지 않은데 나보다 나이가 있고 대접을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웃을 때.


 “아무튼. 무적의 세 단어가 있는데. 저는 그걸 잘 말하는 사람이 좋아요.”

 선배는 내 말에 되묻지 않고 빤히 바라봤다. 여기서 더 질질 끌면 내가 바닥에 질질 끌려다닐 수도 있겠다 싶어 이어서 빠르게 말했다.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이게 무적의 세 단어래요.”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냐고 물었잖아.”

 “그러니까.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이 말 잘하는 사람 만나고 싶다고요.”

 “뭐야 그게. 그럼 우리말만 좀 할 줄 알면 되겠네. 우리말만 할 줄 알면 된다니. 이야. 쉽다.”


 선배가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쉽다'라는 단어를 두고 길게 논쟁했을 테지만,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취한 사람을 붙들고 얘기하느니 물을 떠놓고 달님에게 비는 게 낫다. 곧 선배는 택시를 불러 떠났고 나는 날이 선선해 걷기로 했다. 여름이었다면 진즉에 택시를 타고 갔겠지만 요즘은 밤에 걷기 좋은 날씨다.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곁에 좋은 사람들이 생긴다고 한다. 그럼 언제부터 만난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인 걸까. 요즘 내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가 허다한데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닌 건가. 그 선배를 포함해 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나쁜 사람에 속하려나.


 회사에서 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산다. 메신저, 대화, 메일, 전화, 미팅 등 누르면 곧바로 튀어나오는 재생 버튼처럼.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내 나름대로 고마울 수도 있지 하고 끝내는 일이니까. '내가 고마워하니까 당신도 내 고마워함에 고마워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이 정도 일도 고마워. 내가 고맙다고 얘기할 일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냥 마무리 인사로 고마워. 정도이니까 말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려 노력하고 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할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게 좋고, 사랑한다는 말은 쉽지가 않다. ‘고마워’ 정도의 말은 좀 해도 괜찮지 않을까. 무적의 세 단어 중 한 단어만이라도.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나는 내가 무적의 세 단어를 잘 건네는 사람이었으면. 상냥하고 다정했으면.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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