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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Jan 10. 2019

#05. 그러니까 넘어지지

 ‘올해 최강 한파’라는 뉴스를 접하고 중무장을 한 채 두 발로 선 북극곰처럼 걷고 있었다. 전날 눈까지 와서 빙판길이 넘어지기 좋게 마련되어 있었다. '빙판길에서는 혹시라도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서는 안 된다.'라는 경고를 뉴스 등에서 늘 들어왔기에 나는 양손을 빼고(한 손은 아이스 커피를 든 채) 걸었다.


 회사 근처에 천 원짜리 커피를 파는 작은 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매일 커피 한 잔을 사서 회사까지 걸어간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는 차가운 커피만 마실 수 있는데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걷는 일은 여름엔 괜찮더라도 겨울에는 손에 얼음을 쥐고 걷는 것 같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된 기분이랄까. 장갑을 끼면 해결될 문제인데 정신없이 출근을 준비하다 보면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온 장갑이 떠오르기 일쑤다.


 카페에서 회사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린다. 골목 지름길을 잘 이용하면 8분까지도 가능하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9시 출근이기에 8시 40분에서 50분 사이 회사 근처 골목을 지난다. 그때마다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을 마주친다.

 저 멀리 눈에 익은 초등학생이 바통을 전달하려는 이어달리기 주자처럼 내 쪽을 향해 뛰어왔다. ‘뭐 급하다고 저렇게 뛰어. 그러다 넘어지지.’라는 내 생각에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초등학생이 내 코앞에서 자신의 한쪽 무릎을 빙판에 찍었다. 중세 기사가 왕에게 작위를 받듯, 사랑하는 연인에게 청혼하듯 당당하고 빠르게 말이다. 빙판길을 저렇게 뛰었으니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 아이는 빙판에 찍은 무릎을 빠르게 들어 올리더니 점점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아픔을 모르다가 뒤늦게 고통이 왔겠지. 우는 거 아닌가 하는 내 예상과 달리 초등학생은 한 손으로 바지를 툭툭 털고 다시 뛰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천천히 걷고 있던 나는 뛰다 넘어진 초등학생을 떠올리며 앞발로 얼음이 깨질까 건드려보고 건너는 북극곰처럼 더욱 조심하며 걸었다. 그때 내 오른발이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오른 무릎을 바닥에 찧은 초등학생과 달리 나는 내 하반신 전체와 오른손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이와 비슷한 레슬링 기술이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는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시체처럼 얼음과 커피를 바닥에 흩뿌려놓은 채 나뒹굴고 있었고, 내 바지는 미끄덩거리는 얼음을 위에서 마음껏 물을 흡수하고 있었다. 나는 깨진 얼음 위에 떠있는 북극곰처럼 울부짖고 싶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회사로 속속히 도착할 다른 직원들이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빠르게 일어났다. 그리곤 길가에 흩어진 커피를 치우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빙판길에서 뛰지 않고 조심히 걸어도 넘어질 수 있구나. 뛰어가는 아이를 보고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반대로 행동했던 나도 결국 넘어졌네.’


 빙판길에서 뛰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천천히 걸어도 넘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살면서 저러면 넘어지고, 이러면 넘어지지 않는 공식 따위 없는 거 아닐까.


 빙판길을 마음껏 달릴 생각은 없다. 다만, 누군가 뛰더라도 ‘저러다 넘어지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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