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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Jan 17. 2019

#06. 고기, 누나가 자를게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에도 거리에는 반짝이는 트리가 보이고 캐럴이 들려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연말을 기념해 누나 집 근처에서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대형마트 고기 파트에서 일하는 어머니 덕에 집에서 고기를 자주 먹었던 나는 외식 메뉴로 삼겹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누나 말을 따랐다.


 누나가 자취하는 곳은 'xx장'으로 끝나는 모텔들과 카드를 받지 않는 구멍가게가 있는 동네였다. 내가 중학생일 때 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간 누나는 매년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새로 이사한 집에 놀러 갔었는데 집주소만 바뀔 뿐 동네 모습은 비슷했다.


 오랜만에 만난 누나는 핑크색 폴로 모자(물론 가짜였다)를 쓰고 몸보다 큰 체크 남방에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노란색 간판에 웃고 있는 돼지 얼굴이 그려진 가게로 들어갔다. 삼겹살 체인점으로 고기 질은 좋지 않지만, 값이 싸다는 점 때문에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었다.


 시작은 삼겹살 2인분. 밥과 된장찌개도 시켰다. 집에서 고기를 자주 구워 먹는 내가 집게와 가위를 들었다. 누나와 나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2인분의 고기를 금방 해치우고 다시 2인분을 주문했다. 은색 쟁반에 담긴 고기가 나오자 내 자리에 있던 집게와 가위를 누나가 가져갔다. 왜 그러냐며 고기 굽는 데는 내가 일가견이 있다고 했으나 누나는 단호했다.

 “아냐. 고기, 누나가 자를게.”

날 생각해서 그러는구나 하고 고마워하며 하던 얘기를 이어나갔다.


 누나는 다 익은 삼겹살을 내가 잘랐던 크기보다 훨씬 작게 잘랐다. 내가 크게 자르기는 했지만, 누나가 자른 크기는 너무 작았다. '고기는 큼지막하게 잘라야 맛있는데 너무 작게 자르는 거 아니냐.' 해도 누나는 대꾸 없이 같은 크기로 잘랐다. 나는 의아해하며 밑반찬을 더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를 나와 누나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이사해 보니 어떠냐고, 이 동네는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누나는 번쩍거리는 모텔 간판들 덕에 오히려 안전한 것 같다며 웃었다. 나는 캐럴은 나오지 않지만, 누나가 사는 동네에는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모텔 간판들이 있구나 생각했다.


 혼자 집에 돌아가는 길은 바람도 덜 불고 밥도 먹은 상태라 그다지 춥지 않았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방향을 바꿔 근처 초등학교로 향했다. 밤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 있어 담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새어 나오는 빛 하나 없이 어둡고 조용했다. 나는 원을 그리며 계속 운동장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왠지 서러워 운동장 끝에 있는 하얀 축구골대에 손을 올린 뒤 얼굴을 파묻고 서서 한참을 울었다.


 누나와 작게 잘린 고기가 무얼 의미하는지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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