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랑 Mar 28. 2019

#16. 아저씨도 아니고, 캡틴 아메리카도 아니야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부족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외근이 더 좋다. 그중에서도 버스가 으뜸인데 주로 외근을 가야 하는 곳들은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환승을 하는 반면, 버스를 이용할 경우 한 번에 쭉 가기 때문이다. 빈자리에 앉아 신나게 졸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필요한 업무를 모두 끝내고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때. 흐린 하늘이 기어코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가방에 미리 접이식 우산을 준비해왔기에 비가 내리는 것쯤 상관없다 생각했다. 나는 뭐든 미리 챙기는 편이다.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들의 자리가 정해져 있을 정도다. 사실 이건 모두가 그러지 않나 했는데 몇몇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런 게 다 정해져 있느냐. 그건 왜 들고 다니냐. 너답다. 등등 얘기했을 때 내가 ‘혹시와 미리’에 가까운 사람이구나 했다. '혹시와 미리'는 ‘혹시 몰라서’와 ‘미리 챙겨놔야’의 준말이다.

 툭툭. 비가 떨어질 때 버스에 올라탔다. 창문에 부딪혀 떨어지는 물방울들 사이로 거리에서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 자신 있게 우산을 펼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무릎 위에 놓아둔 가방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검은색 접이식 우산을 확인했다. 아침에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우산을 챙길 때는 귀찮음과 더 무거워질 가방의 무게가 신경 쓰였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니 무언가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은 친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를 피해 서로 밀착해 서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자연스럽게 내린 뒤 한데 뭉쳐있는 사람들을 슬로 모션 효과를 준 액션 영화처럼 지나치며(이상한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여유롭게 가방 안 접이식 우산을 펼쳤다. 착착착 3단 우산이 만세를 부르듯 펼쳐졌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손에 가방을 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었다. 횡단보도 중간쯤이었다. 그때. 그 순간에. 내 검은색 3단 우산이 콩나물 대가리를 떼듯 툭 부러졌다. 거인이 와서 내 우산에 꿀밤을 때린 것처럼 우산 손잡이부터 펼쳐지는 곳까지 이어진 쇠가 툭. 쇠 중간이 휘어지거나 접힌 게 아니라 정말 저 꼭대기 연결된 부분이 끊어졌다. 우산이 펼쳐지는 부분만 남게 된 것이다. 우산의 머리만 남았다. 횡단보도 중간에 있던 나는 한 손에 우산 머리를, 다른 손에 우산을 받치고 있던 긴 쇠막대기와 가방을 들고뛰기 시작했다. 큰 건물 밑으로 비를 피한 뒤 내 우산에 벌어진 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본래 3단으로 작아질 수 있게 만들어진, 한때 우산과 한 몸이었던 긴 쇠막대기를 토르가 망치를 바닥에 내리치듯 몇 번 반복해 내리쳤다. 1단의 모습으로 작게 만들어 가방에 넣었다. 긴 쇠막대기를 땅에 내리칠 때 동시에 벼락이 치기도 했다. 나는 이 상황이 웃겨 혼자 실실거렸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피해 빙 둘러갔다. 토르의 위엄 때문이리라.

 머리만 남은 우산은 천이 펼쳐지는 부분을 손으로 꾹 누르지 않으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엄지로 펼쳐지는 부분을 꾹 누르면서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우산대를 잡고 머리 위로 올려야 비를 막을 수 있었다. 나는 물건들을 정비한 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로마 시대 병사처럼 머리 위로 방패(우산)를 올린 모습이었다. 비가 내리는 중이라 그런지 전장의 느낌이 났다. 비장한 눈빛으로 회사를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머리 바로 위로 우산을 쓰니 비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우산의 펼쳐지는 부분을 누르고 있는 엄지손가락이 아파왔다. 게다가 팔이 저려 우산이 점점 내려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바닥을 보며 걸었다.


 “할머니, 저 아저씨 봐. 캡틴 아메리카 같아.”


 빠르게 걸었기에 꼬마의 말밖에 듣지 못했다. 할머니가 뭐라 했는지 듣지 못한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정신없이 걸어 회사 건물로 들어오고 나서야 방패 아니 우산을 내려놨다. 우산을 꾹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살폈다. 살에 자국이 생겼다기보다 파였다고 해야 맞으리라.

 부러진 우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 업무 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진동음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로 끝나는 내용이었다. 나는 한 때 우산이었던 것들을 쓰레기통 한쪽에 치워놓고 서둘러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언젠가 그 꼬마를 만난다면 난 아저씨도, 캡틴 아메리카도 아니라고 말해주겠다고. 특히 아저씨 말고 형이라고. 형.


 이 사건 이후로 뭐든 미리 챙기려는 강박에 가까운 버릇을 부러 줄이고 있다. '혹시와 미리'로 상대하기에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으며 또 어떤 걸 콩나물 대가리 떼듯 가져갈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5. 사랑도 늙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