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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Jun 13. 2019

#26. 손흥민과 치킨 그리고 선생님

 일요일 새벽. 5분에 한 번씩 현관문을 열고 도로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 흔한 고양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 번쯤 현관문을 열고 아파트 복도에 나갔을 때 묵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에 입을 최대한 벌린 채 소리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음소거한 헐크 영화처럼 내가 울부짖는 이유는 하나였다. 듣는다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치킨을 주문한 지 1시간 30분이 넘었음에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일요일 새벽 4시에 열리는 축구 경기를 일주일 전부터 기다렸다. 회사에서 사람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그날 어디서 볼 예정이냐, 누구와 볼 거냐, 손흥민이 골을 넣겠느냐, 어느 팀이 이기겠나 등등 종일 축구 얘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2018-2019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자 대한민국 축구선수인 손흥민 선수가 속한 팀 토트넘과 상대팀 리버풀 이야기다.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게 무엇이냐 물을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경기라 설명하면 되려나.


 기다리던 축구 경기가 시작되는 날. 평소와 달리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일요일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미리 해두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오고 새벽 경기를 위해 저녁도 굶은 채 일찍 잠에 들었다.

 새벽 3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뜬 나는 빠르게 치킨을 주문했다. 혹시라도 축구 때문에 배달이 밀리는 상황을 대비하여 1시간이나 일찍 주문했다. 사전 준비가 철저했던 나는 이미 새벽 5시까지 영업하는 치킨집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손흥민 선수는 선발로 경기에 나섰다. 새벽 4시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결승전이 시작됐다. 3시에 주문한 치킨은 아직이었다. 경기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시작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실점했다. 나는 손흥민 선수가 속한 팀을 응원했기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직 초반이었기에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양 팀의 치열한 경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치킨은 오지 않고 있었다. 저녁을 먹지 못한 내 배는 더 이상 축구에 집중할 힘이 없었다. 손흥민 선수의 골보다 오지 않는 치킨을 더 기다렸다.


 축구 경기 전반전이 끝났다. 물론 치킨은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가게에 전화를 걸어 조곤조곤 화를 냈다. 치킨을 주문한 게 2시간 전이다. 어디서 오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가. 축구 때문에 배달이 밀린다면 미리 얘기를 하거나 주문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냐 하고 말이다. 내 말이 끝난 뒤 치킨집 사장님이 말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오늘 축구 때문에 배달이 밀린 것 같습니다. 배달이 너무 많아서 저희가 언제 도착할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주문하신 지 2시간이 넘으셨다니 아마 곧 도착할 겁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버지 아니 할아버지에 가까운 목소리의 남자가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며 죄송하다 말했다. 순간 나는 바닥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갇혀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흥민이고, 결승전이고, 치킨이고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왜 이 시간에 나보다 몇십 년은 더 살아온 사람에게 선생님이란 말을 들으며 사과를 받고 있는 걸까.


 전화를 끊고 십분 뒤 차갑게 식은 치킨이 도착했다. 나는 치킨을 펼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축구는 후반전 진행 중이었고 손흥민 선수가 위협적인 슈팅을 했는지 해설자와 캐스터가 아쉽다며 소리를 질렀다. 높은 곳에 올라간 듯 귀가 먹먹하고 아팠다.


 축구 결승전은 손흥민 선수가 속한 팀이 2대 0으로 패했다. 치킨 몇 점을 주워 먹은 나는 남은 것들을 비닐에 포장하여 냉장고에 넣은 뒤 침대에 누웠다.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꼭 그 시간에 치킨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치킨을 먹지 못한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계획에서 벗어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아니, 대부분의 일이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던가. '이렇게 되면 절대 안 돼'는 없다.

 언젠가 통화 중에 친누나가 말했다.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터 하지 않는 게 시작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달래고 자신을 좀 풀어줘야 한다고 말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렇게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렇게 해버리거나 그런 일이 벌어져도 툭하고 넘기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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