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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May 23. 2019

#24. 여름은 아버지 등으로부터 온다

 선풍기 날개를 빼기 위해서는 앞 고정나사를 반대로 돌려야 한다. 보통의 나사는 오른쪽으로 돌리면 잠기고 왼쪽으로 돌리면 풀리게 되어 있지만, 선풍기 날개를 얻기 위해선 오른쪽으로 돌려 풀어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손에 실내화 가방을 들고 군데군데 까진 회색 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습니다 큰소리로 외치면 집 작은 화장실에서 아빠 여기 있어라는 대답이 들려오는 계절이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보면 아버지가 비좁은 화장실에 웅크린 채 분리해 놓은 선풍기를 닦고 있었다. 걸리버가 소인국의 커다란 탑을 닦는 듯 아버지는 큰 몸을 최대한 작게 접어 손에 모가 닳은 칫솔을 들고 등을 보인 채 선풍기 먼지를 제거했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곧 여름이 시작됨을 알았다. 이제 더워지겠구나. 반팔과 반바지를 입겠구나. 친구들과 저녁까지 뛰어놀아도 금방 어두워지지 않겠구나. 안방과 누나 방에 각각 선풍기가 놓이겠구나 했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이 시절에도 분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집 현관문을 열 때마다 어린 나는 마음을 졸였다. 문을 열었을 때 저 많은 물건이 우리 집 어디에 숨어있었나 할 정도로 갖가지 것들이 바닥에 내던져 있거나 아니면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에 물건들이 날아오거나, 술을 먹는 중이거나 했기 때문이다.

 다녀왔습니다 큰소리로 외쳤을 때 대답이 들려온다는 건 의식이 있다는 얘기이고 의식이 있다는 건 아버지가 술 대신 무언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름이 그랬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름 시작 무렵에 그랬다. 나는 아버지가 신으로부터 낡은 선풍기를 닦는 일만 부여받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정성스레 그 일에 몰두했다. 두 대의 선풍기를 조심스럽게 분리해 화장실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가 떠올랐다. 커다란 몸과 굽은 등, 살짝 기우뚱거리며 걷는 걸음걸이와 손에 들려 있는 선풍기 부품들 그리고 주황빛의 화장실.


 여름은 아버지 등으로부터 시작됐다. 고등학생이 되어 선풍기 정도는 쉽게 분리하여 닦을 수 있을 때에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에게 넌지시 여름이 오는 것 같다 말할 뿐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어김없이 선풍기 닦는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이제는 자신의 몸에 비해 조금 커진 화장실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늦게 퇴근한 어머니와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깨끗하게 닦여 방에 놓인 선풍기를 보며 아버지에게 고맙다 말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자신이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 해주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이런 느낌을 언제까지나 받았으면, 잃지 않았으면 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간혹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며 소리치곤 했다. 아버지를 무시하는 건 그 자신뿐이었다.

 깨끗해진 선풍기가 방에 놓이면 나는 괜히 안방에 가서 선풍기를 켰더니 살 것 같다거나 훨씬 낫다며 진작에 꺼낼 걸 그랬다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셔도 별 탈 없이 기분 좋게 잠들었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이 시작될 때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내가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선풍기를 닦는다. 언젠가 아버지가 선풍기를 닦는 당신의 등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어린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선풍기 날개를 분리할 때는 이 앞의 나사를 반대로 돌려야 돼. 보통은 왼쪽으로 돌리면 풀리는데 선풍기는 달라. 기억해 둬. 선풍기 날개는 오른쪽으로 돌려야 풀리는 거야.”

 그는 굉장한 물건을 만들어낸 장인처럼, 올림푸스 신들에게 기립박수라도 받는 헤파이토스처럼 장엄했다. 선풍기를 닦을 때마다 생각나는 이 장면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자신이 아는 지식을 알려주는 부모와 모르는 걸 배우는 자식. 뻔하지만 이런 역할의 모습이 그와 나를 기쁘게 했다.


 벌써 더운 걸 보니 여름이 시작되나 보다. 아버지 등으로부터 오던 여름. 이제는 여름으로부터 아버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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